죠터.

만년필.

by stay gold




만년필

만년필에 취미를 붙이고 수십 자루의 만년필을 모을 정도로 푹 빠졌다. 각각의 만년필마다 고유한 매력이 있었고, 여기에 어떤 특성의 잉크를 담느냐에 따라 같은 만년필도 전혀 다른 필감을 선사했다. 새로운 만년필을 손에 쥐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만년필에는 삼대장(3대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흔히 '몽펠파'라고 줄여서 부르는 몽블랑, 펠리칸, 그리고 파카. 이 세 개 브랜드의 만년필들 중, 몽블랑의 149, 펠리칸의 m800 또는 m1000, 그리고 파카의 51을 합쳐 만년필의 삼대장이라 부른다.


(특히 손이 닿는 펜은) 중고 구매를 피하는 터라, 오래전 단종되어 신품으로 구하기 어려운 51 대신 신품으로 보존되어 있던 파카 45를 구매했다. 여기에, 파카의 인기 모델 듀오폴드, 그리고 149와 m800까지 만년필 삼대장을 모두 들이고도 한참 뒤 우연히 구매한 파카 죠터.


조금 괜찮다 싶으면 30만 원에서 40만 원을 훌쩍 넘기는 만년필의 세계에서 3만 원 ~ 4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죠터 만년필은 가장 저렴한 펜이라 해도 무방할 수준.


하지만, 그 저렴한 죠터 만년필을 손에 잡고 나서 드디어 만년필 방황을 끝내고 내가 찾던 목적지에 닿은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화려함이 아닌 수수함으로 지켜낸 만년필의 아이덴티티, 적당한 필감, 손에 감기는 맛, 잉크의 특성을 받아내는 수용성까지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내게는 최고인 만년필을 찾았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만년필은 단연코 파카 죠터.




하지만 누군가 만년필 추천을 부탁하면 적당한 가격의 세일러나 펠리칸, 부탁한 이께서 기왕 사는 것 만년필의 정석을 잡아보고 싶다고 하면 몽블랑 149를 추천한다.


그것들을 모두 잡아보고 한참 사용하고 나서야 파카 죠터가 얼마나 훌륭한 펜인지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껏 만년필 추천을 부탁했는데 3만 원 ~ 4만 원짜리를 이야기하면 가성비를 생각해 저렴한 것을 추천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기 때문. 그리고 또 하나, 내게는 죠터가 최고의 만년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싼 맛에 쓰는 그저 그런 펜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죠터의 매력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많은 만년필을 잡아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나서야 죠터의 매력을 알아볼 눈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몇 자루 잡아보는 것으로는 쉬이 깨닫기 어렵다.

149가, 51이, m800이 죠터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는 판타지는 결국 그것들을 모두 잡아보고 한참 사용하고 나서야 깨질 수 있다. 수십 자루의 만년필, 수십 병의 잉크를 경험하고 나서야 저렴한 펜에 불과하던 죠터가 매력 넘치는 종착지로 보였다.




이미 가지고 있음


코엘류의 연금술사를 떠올린다.


처음부터 발견하면 좋을 테지만, 그것은 대개 문장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여정이 없었다면 발견할 시선도 갖지 못했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발견함' 같은 것은 모두 지난 뒤에나 할 수 있는 환상 같은 이야기.


오늘 하루도 파카 죠터와도 같은 무언가에 닿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일는지 모르겠다.

필요한 시행착오.


그저, 언젠가는 닿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니다.

어디, 닿는 것이 인생이던가. 나아감 그 자체가 삶이지.



*이 글은 파카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싶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