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실패로 지킨 자존심.

by stay gold



순례길을 모두 걷고 돌아와 열흘을 푹 쉬었다.


몇 개월 동안 연락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던 것을 두고 성화인 이들과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며, 걸었던 것이 모두 꿈인가 싶어질 즈음 생각난 숙제. 떠나기 전 출판사 지인의 권유로 책 한 권 쓰는 것을 덜컥 약속해 버렸으니, 이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 샘플 원고 두 편을 보고 이것저것 가늠하자는 출판사 측 이야기에 시작된 노트북 앞에서의 시간. 이것이 책으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준점부터 문제였다. 어느 수준까지 솔직해야 하고 어느 정도까지 미화해야 하며, 얼마큼 담아내야 적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게스트로 출연 중이던 몇 개 라디오 프로그램의 내 출연 분량 원고를 직접 쓰며 단련한 덕인지 글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책을 쓴다고 생각하니 단 한 문장도 쉽지 않았다.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쓰고 지우기만 반복하다 며칠 만에 꾸역꾸역 완성한 샘플 원고. 하지만 결국 출판사에 보내지 않았다. 보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비하면 형편없는 그 글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글을 모아 책을 낼 수 없었고, 작가가 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없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능력 부족을 고백하며 출판사와의 약속을 물렀다. 부담 없이 편하게 써도 괜찮다는 다독임도 있었지만, 그렇게 싫어하던 종이 아까울 짓을 내가 거들 수는 없었다.


결국 ‘작가’라는 두 글자를 프로필에 끼워 넣는 것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실패 덕에 그나마 ‘좋은 글을 좋아함’이라는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때로는 성공이 더 치욕스럽고, 실패가 그나마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던 어느 겨울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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