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정부의 채무 탕감 정책과 형평성.

상대적 박탈감과 상대적 박탈의 차이.

by stay gold

1.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자유로운 시장 경제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다. 한 만큼 얻을 수 있다니,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2. 당시 나의 눈에 비친 노숙인들은, 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시장에서 ‘하지 않아 얻을 수 없었던’ 낙오자였다. 지금, 나아가 젊은 시기에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은 이들이 얻은 결과라 생각했다.


3. 사회생활을 하며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사연들을 알게 됐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실히 일을 하던(해야 하던) 인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길거리로 내몰리기도 하고, 쪽잠을 자며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던 영세 자영업자가 쓰러져 빚쟁이가 돼 나앉기도 한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결과를 얻은 이들이다.


4. 위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결과를 얻은 이들과는 다른, ‘그리했으므로’ 악결과를 얻은 이들도 있다. 나태와 방만 등 개인의 해태함으로 인하여 악결과를 얻은 이들도 있다.


5. 참여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자유로운 시장에 대한 호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시장 참여자가 얻는 결과가 단지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참여자에게 주어지는 자유‘에도 사각지대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보완은 필요하다. 처음부터 사각지대에서 츌발했거나, 사각지대로 이동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얻은 악결과의 책임 모두를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


6. 물론, 시장에 대한 보완책은 지금도 작동 중이다.

예컨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인부는 업주의 과실 유무와 상관없이 산재보상법에 따른 보상, 업주의 과실이 있는 경우 (과실과 손익 상계 후) 업주로부터 배상도 받을 수 있다. 영세 자영업자들을 향한 금융 상품이나 지원책들도 준비되어 있다. 이들처럼 시장의 사각지대로 ‘이동당한’ 이들을 위한 보완책 외, 처음부터 사각지대에서 시작한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도 없잖다.


7. 하지만, 예외의 상황에 처하는 이들도 있다. 노동에 복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충분치 않은 산재 보상을 받은 뒤 결국 내몰리게 되는 이들, 여러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내몰리게 되는 이들이 있다.


‘더 노력했어야지’라는 조건을 붙여 저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70에서 시작해 80이 된 사람이 0에서 시작해 50이 되었지만 그즈음의 세상에 설치된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추락한 사람에게 ’더 노력했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8. 따라서, 개인이 아닌 사회가 만든 장애물, 이 시대의 사각지대, 결과의 절댓값이 아닌 노력의 상대값 등등 여러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하여 보편적 복지 이상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공정과 형평의 관점에서 타당하다.


9. 공정, 형평 가치 실현에 따른 사회 안정성 확보라는 이익을 얻으려면 비용이 발생한다. 국가 단위에서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당장, 선별 작업부터 비용이 들어간다.

적극적 제도의 구제 대상이 될 이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결과에 내몰린 이들’과, 최소한의 존엄성 유지를 위한 보편 복지의 대상이되 적극적 지원 대상으로 인정하면 오히려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스스로 악결과를 초래한 이들’을 구분하는 것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개개인의 사연을 청취하고 이력을 조사해 선별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에 대한 비용 편익을 생각하면 기름값 아끼겠다며 서울에서 대전 주유소를 찾아가거나,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모두 태우는 일일 수 있다.


비용과 효용, 모두를 따져야 한다.




‘7년 이상 5천만 원 이하 연체 채무 탕감’


연체 기간, 연체 금액 기준으로 대상을 선별했다. 금융위원장은 대상자의 소득과 재산을 모두 심사할 것이며, 가능하면 사행성 사업과 도박 관련 채무는 별도 심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나는 돈 잘 갚았는데 나라가 빚 갚아주다니 억울’ 정도로 반응하는 것은 감정적으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한 반응. 따지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결과에 놓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구분에 들어가는 비용과 얻을 수 있는 (물질과 가치를 포함한) 이익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수지타산,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장의 자유와 사각지대 및 장애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바탕으로 접근하고 따져야 할 것. 소위 ‘빼애액’하며 감정적으로 발끈할 것이 아니라, ‘삐이익’ 발언 버튼 누른 뒤 시행의 효용이 발생하는 (물질, 가치를 모두 포함한) 비용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70에서 시작하여 80에 닿은 이들 중 일부가 감정적으로 느낄 상대적 박탈감과 0에서 시작하여 50 즈음에서 사회의 장애물에 걸려 추락한 이들이 내내 당했을 상대적 박탈 중 어느 것을 챙기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


‘나’에서 벗어나 ‘우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선별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최대 효용을 따지며 후자를 챙기는 것이 형평성을 챙기는 것일 수 있다.



‘나는 갚았는데 쟤는 왜’가 적절하려면, 나와 쟤의 상황이 얼추 비슷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속한 많은 이들이 추락하여 갇힌 그곳에서 탈출의 기회, 나아질 기회를 얻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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