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알바.
일흔이 다 되어가시는 어머니께서는 한동안 어린이집에서 알바를 하셨다. 하루 서너 시간, 아이들의 점심 식사 및 낮잠 시간에 아이들을 챙기며 얼마의 월급을 받으셨다.
어머니의 본업은,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본업은 임대업. 은퇴하시기 전까지 모 기업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와 평생 가정주부셨던 어머니, 두 분은 우리 형제 뒷바라지가 모두 끝난 뒤 남은 돈으로 열댓 세대의 투룸이 있는 건물을 하나 지어 그곳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연금으로 생활하신다. 수요가 제법 많은 지역이라, 임대료와 연금을 합치면 두 분 생활하시기에는 충분하다.
딱히 돈 들어갈 곳도 없고, 우리 형제가 틈틈이 용돈도 드리고, 뭐든 필요하신 눈치면 서둘러 사서 보내드리는데 왜 그 연세에 수고를 자처하시냐며 몇 번이나 말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뜻은 완고했다. 아이들을 챙기며 느끼는 보람, 그것이 큰 행복이라며 기어이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덕분에 우리 형제는 어머니께서 근무하시는 어린이집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사서 보내기도 하고, 선생님들께 한약을 선물하거나 명절 선물을 챙기는 등 생각지 않던 것까지 챙기게 됐다. 아들 노릇 비용이 훌쩍 늘었다. 자식 맡긴 심경이나 부모님 맡긴 심경이나 비슷하려나 싶다.
알바의 이유
어린이집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 ‘(명예) 이사님’이 되고도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는 허리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알바를 그만두셔야 했다. 아이들과 헤어지며 참 많이 우셨다.
간혹 건물주가 어쩌고, 얼마 벌면 생활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머니의 알바가 생각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에서는, 풍요가 편리를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풍요가 곧 평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풍요로는 채워지지 않는, 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풍요는 좀 더 편리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도록 돕는 수단. 단지 수단일 뿐인 풍요 그 자체를 목적이니 꿈이니 하며 쫓는 것은 결핍을 얻기 위해 충족하는 길.
충분한 풍요를 두고도 보람을 위해 알바를 하는 것이 인간.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부를 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단지 부만 쫓는 것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몸이 따라주질 않아 아쉬움에 울며 그만두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미 좋은 어느 중년의 잡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