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엄마가 죽는지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 듣고 살아서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또 뭔가 심사가 뒤틀리셨나 보다.. 휴대폰에 ‘엄마’라고 뜰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지만 나는 매번 엄마가 참 많이 아프다. 그래도 심호흡 한번 하고 한껏 목소리 높여 “아이고~ 우리 오마니 또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나~~~”
어릴 때는 분명 지금 엄마는 계모이고 언젠가 다정하고 젊고 예쁜 친엄마가 나타나 나를 데려가 줄 거라 생각하며 잠들었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분은 여전히 나의 엄마다 ㅋ
게다가 그분은 참 변하지도 않는다.
엄마가 화내는 타이밍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이유도 맥락도 없다. 언제 화낼지 모르니 나에게 집은 앉으나 서나 불안한 곳이었다. TV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집안일을 도울 때도 벼락같은 고함이 뒤통수에 날라 올까 조마조마했다.
내가 실수로 발을 밟으면 밟았다고 화내고, 엄마가 내발을 밟으면 거기 있었다고 화내고(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물 마시면 물 끓이기 힘든데 많이 마셨다고 화냈다(그때는 거의 모든 집이 보리차나 옥수수 차등을 끓여 먹었다). 흠.. 목 말라죽어도 참아야 하는 것인가??
하루는 점심때가 됐는데 엄마가 안 돌아오셔서 어린 내가 밥을 차려 동생과 함께 먹었다. 내심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거의 저녁때가 다 돼서 들어와 엄마 밥 안 남겼다고 우리를 잡아먹을 듯 혼냈다. 어린애들이 밥을 차려먹은 게 더 기특한 것 아닌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애가 잘못하면 뭘 그리 잘못했을까?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데 한 밤중에 집 밖으로 쫓겨났다. 캄캄한 집 앞 골목에 서있던 공포는 지금도 종종 꿈에 나타난다. 이건 빙산의 일각 일뿐 정말 창의적이고 버라이어티 하게 화낼 거리를 만들어내셨다.
맥락 없이 혼나다 보니 맞을 때도 어디를 맞을지 몰라 온 몸에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머리 다리 어깨 등짝, 어디로 엄마의 회초리가 날아올지 몰라 더 공포였다. 무엇을 집어 들지 모르니 평소에 길쭉한 것은 모조리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놓는다.
중학교 때부터는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해놔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방학에는 아침 일찍부터 설거지 집안 청소, 빨래까지 다 마치면 벌써 점심때였다. 물론 이런 일을 하고도 한 번도 잘했다거나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항상 더 부족한 곳을 찾아서 혼나곤 했다.
매일을 언제 혼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사는 불안함과 혼날 이유가 없는데 혼나는 부당함을 견디고 살아야 하니 사춘기 때는 매일 밤 잠들고 다시 깨고 싶지 않았다.
20대에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자랐으며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동정을 구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를 닮은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하는데 또 그 모습을 닮아있다니.. 엄마를 닮은 내 모습이 싫어서 심리학 책을 읽기 시작했고 치유집회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보다 더 상처 받고 힘들었을 나보다 어린 엄마가 보였다. 이해되고 오히려 가엽게 여길 수 있게 됐다
엄마는 시아버지도 없는 가난한 집 장남에게 시집와 고모, 삼촌들 키우고 시집 장가까지 보냈다. 동짓달에 애 낳은 며느리를 몸 푼 지 3일 만에 얼음 깨고 냇가에서 빨래시킨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있었다. 몸이 약했는데 자식들이 좀 커서는 돈 들어갈 데가 많으니 약한 몸을 이끌고 고된 일까지 해야 했다. 그런 중에도 넘쳐나는 집안 대소사며 제사까지 모두 큰 며느리인 엄마 차지였다. 자식들도 고만고만해서 큰 자랑거리도 없으니 낙은 없고 힘들기만 했을 것이다, 매일매일 살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니 많이 지치고 매사에 짜증 났을 것이다.
나는 엄마보다 훨씬 여유 있고 건강하고 이상한 시댁이 없어도 사는 게 쉽지 않은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어릴 땐 춤바람 나서 남편 자식 다 버리고 집을 나간 아줌마들 얘기가 간혹 뉴스에 나오고 실제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내가 부러워하던 다정하고 젊고 예쁜 은주네 엄마였다.
한 번은 엄마를 찾아와 밖에 나가면 얼마나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궁상맞게 이러고 사냐며 엄마 보고 같이 나가 자고 했단다. 옛날 얘기할 때면 “그때 은주 엄마 안 따라가고 우리 키워줘서 고맙네~~”라며 엄마에겐 농담처럼 말하지만, 고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고 삼 남매를 키워낸 엄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말로 어찌 부모님의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지금 엄마는 어려서 제일 구박하고 차별했던 나를 가장 의지한다. 오빠와 동생은 나처럼 엄마를 받아주지 않는다. 오빠는 남자라 동생은 미혼이라 엄마에 대한 공감이 적은 것일 뿐 둘 다 누가 봐도 착한 자식들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는데도 몸은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나 보다.
휴대폰에 ‘엄마’라고 뜰 때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이 쿵... 내 키보다 더 깊이 내려앉는다. 마음보다 몸이 더 정직한 걸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그래도 또 한 번 심호흡하고 목소리 높여 “오마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