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어떻게 변해 왔는가

그늘에 있던 아버지, 이제는 곁으로

by 황희종

내가 어릴 적 자라던 시골 마을에는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해가 지면 어둠이 금세 마당을 삼켰다.


그 어둠 속에서 작은 호롱불 하나가 방 안을 밝혔고,

아버지는 그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곤 했다.


그러다 피곤이 몰려오면
책을 덮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때, 불빛 아래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 그 사람임을 느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대신 책임으로,
눈빛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가족을 지켰다.

삶은 고단했고, 하루의 끝에는
늘 피곤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아버지는
희생으로 존재를 증명하던 세대의 상징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이끌어야 할 대상’이었고,
자신은 그늘 속에서 조용히 버텨야 하는 존재였다.


세월이 흘러 산업화가 삶의 리듬을 바꾸었다.
도시로 향한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아버지는 가정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의 이름으로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 들어갔다.


퇴근 후에도 마음은 늘 무거웠고,
자녀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아버지에게
감정보다 인내를,
표현보다 절제를 요구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대신,
돈으로, 물건으로, 혹은 침묵으로
마음을 전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세상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정보화와 개인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가정의 풍경도 달라졌다.
이제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로
가족을 지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웃고 대화하는 동반자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퇴근 후 식탁에 앉아 아이의 하루를 묻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나 역시 그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깨달았다.
젊은 시절엔 일터가 전부였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늘 집을 비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식탁 위의 짧은 대화 한마디,
함께한 저녁 한 끼가
그 어떤 성취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가장이 아니라,
따뜻한 아버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의 아버지들은 조금 더 서툴지만,
훨씬 더 따뜻하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그 눈물 속에는 약함이 아니라
진심과 공감의 힘이 깃들어 있다.


결국 시대가 변해도
‘아버지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명령하던 자리에서
대화하는 자리로,
희생하던 자리에서
함께 웃는 자리로.

아버지의 자리는 여전히 가족의 중심이지만,
그 중심은 이제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지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아버지의 자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곁에서,
여전히 조용히 빛나고 있다.

� 시리즈: 사람을 향한 마음
(다음 편 예고 ― 「권위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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