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의 세계에서
결정이 내려진 뒤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절차대로 했다”, “법대로 했다”는 설명이다.
그 말은 종종 모든 질문을 멈추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절차는 결정을 대신할 수 없고,
설명을 대신할 수도 없다.
절차는 중요하다.
공정함을 담보하고,
자의적 판단을 막으며,
권한 남용을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그러나 그 절차가
설명을 생략하는 이유가 되는 순간,
공직의 품격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절차는 과정일 뿐,
결정의 의미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공직의 결정에는 항상 질문이 따라온다.
● 왜 지금인가
● 왜 이 방식인가
●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가
이 질문들은 절차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공적 판단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요구다.
그런데 이 질문들 앞에서 “절차상 문제는 없다”는 말만 남을 때,
공직의 언어는 설명의 언어가 아니라
차단의 언어로 바뀐다.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판단이거나
● 공적으로 납득되기 어려운 선택이다
이때 절차를 앞세우는 것은 결정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명을 피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 순간, 절차는 신뢰의 장치가 아니라 방패가 된다.
공직자의 품격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결정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서 드러난다.
불편한 질문을 감수하고 비판을 듣더라도
왜 그 판단에 이르렀는지를 말로 남길 수 있는 태도
그 설명이 있을 때 절차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설명이 사라진 절차는 공정함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신뢰를 얻지는 못한다.
나는 공직을 떠난 뒤에도 이 장면을 자주 마주한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그 결정에 대한 설명은 끝내 나오지 않는 모습.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음 이슈로 덮여 버리는 방식.
그럴 때마다 공직의 품격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절차는 설명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설명 없는 결정은 공적 판단이 되기 어렵다.
공직의 자리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이기 이전에,
설명을 감당하는 자리다.
그 부담을 견딜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자리는
공적인 신뢰 위에 선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내려지는 결정들 가운데,
당신은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절차라는 말만 남아 있었습니까?
설명 없는 절차 앞에서 우리는 과연
공직의 품격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