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어린 시절 설날이면 큰집에서 떡국을 먹으면서 나이를 먹는 것을 기념하곤 했다. 떡국 두 그릇을 먹으면 두 살을 먹는 것이라고, 다 같이 와하하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골 국물의 떡국이 맛있어서, 또 그 시간이 즐거워서 내년 이맘때가 오기를 바란 적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학창 시절이 지나갔으면 해서, 얼른 나이가 들기를 바란 적이 있다. 단순하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되바라지고 실속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동시에,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루함과 보잘것없음까지도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서 그 시절의 지루함과 보잘것없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서툴겠지만, 내게는 유난히 더 그랬다. 유독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좋게 말하면 과감하게, 나쁘게 이야기하면 충동적으로 살았다. 어떤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쉽게 지루함을 느꼈다. (나중에 이것이 일종의 장애임을 알았다.) 반대로 나는 두 번 하는 것에 특히 강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꼭 얻고 싶었던 것들을 여러 번 시도해서 꼭 얻어냈다. 학업, 게임, 연애, 우정, 생계까지. 그리고는 한 번만에 해내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많은 판타지 소설과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갖은 역경을 우월한 능력으로 단숨에 극복하는 주인공에 이입해 쾌감을 느꼈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꽤나 능숙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 내가 느끼는 치열함. 두려움과 스트레스, 주눅 듦을 비껴갈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나이 듦을 실감하는 순간은 내가 경험하는 지금으로부터 내 기억과의 유사점을 발견할 때다. 이제 더 이상 처음 하는 것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평생토록 경험할 것들을 100%로 두고, 지금까지의 누적치를 시간선 위에 나타낸다면, 80% 정도는 채워졌을 것 같다. 나는 두 번째의 시도에 강하다. 어떤 일은 한번 만에 해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이 듦이 상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삼각함수처럼 파동의 형태를 갖고, 변곡점을 지나면 머지않아 가파르게 쇠한다. 죽음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근차근 가까이 오는 것이다. 나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고 느낄 때마다 나이 듦을 다시 실감한다. 팔자주름이 파이고, 정신없이 일하고 나면 또 한 달이 지나있을 때마다 그렇다. 나이 듦이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한다.
그렇다면 나이 듦을 잊을 만큼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데, 나는 남과 비교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쩌면 인생에는 때가 있어서 나는 때를 놓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주를 이룬다. 나는 약아서 그런 것이 굉장히 싫다. 어느 날에는 퍽 여유로워지다가도, 어느 날에는 조급해진다. 휘둘리기도 많이 휘둘린다.
투자고수들이 ‘투자근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있다. 투자종목에 대해서 충분히 가치판단을 하고 진입하게 되면, 변동성이 아무리 커도 상승할 것을 굳건히 믿기 때문에 포지션을 오락가락 바꾸지 않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다. 이것이 투자근육이 발달한 상태이다. 나이 듦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이근육’이 발달하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나면, 나이 드는 일이 그렇게 두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투자근육은 다년간의 투자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근육이다. 다년간의 떡국을 먹은 경험으로 나이근육을 키울 수 있다면 좋겠다. 따져보면 죽음은 처음 죽는 것이기에 그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피할 수 없겠지만, 나이 드는 것이야 계속 경험하는 것이기에 두렵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