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을 하나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18
재능이라는 단어에는 낭만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되는 것에 대한 낭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재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농구선수가 대접받는 이유는 농구의 규칙이 널리 퍼져있고, 농구라는 스포츠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농구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농구선수는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한다. 머리통만 한 공을 스무 발 뒤에서 정확히 던지는 재능, 공을 튕기며 뛰어다니는 재능은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없다. 그래도, 드리블과 슈팅을 잘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명확하다.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재능도 있다. 라커룸에서 팀원과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재능, 농구 규칙하에서 최선의 전략을 찾아내는 재능, 화가 난 팀원의 감정을 다독이는 재능은 쓸모를 잃지 않는다. 농구를 모르는 시대가 오고, 매드맥스의 디스토피아가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온갖 제약을 초월하여 모든 것들의 신이 되지 않는 이상 그러한 재능들은 계속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그런 본질적인 재능을 가진 농구선수는 반도체 공장에 가서도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 재능을 가지고 싶다는 말의 기저에는 ‘내게는 그 재능이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 생각을 가지게 되려면, 내게 그 재능이 없어 좌절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대학시절 경험이 떠오른다.
나는 전공이 외국어였다. 전공 공부를 위해 단어와 문법을 열심히 외워야 했고, 열심히 외웠다. 어느 날은 밤을 새워가면서 시험을 대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성적은 늘 B0~B+로만 받았다. 정말 잘해봐야 A0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반대로 어떤 친구들은 노력에 비해 쉽게 점수를 받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들도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좌절을 경험했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안되는구나. 내게는 재능이 없고, 저들에게는 재능이 있구나. 나도 잘하고 싶은데 안되네. 단어나 문장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점 하나 잘못 찍어서, 줄 하나 잘못 그어서 점수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부분을 좀 더 훈련했더라면 좋은 점수를 받지 않았을까. 같은 종류의 생각들이 들었다. 그들의 정교한 암기력은 분명 재능이다. 암기해야 하는 정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좋은 효율로 정확하게 암기하는 재능. 분명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재능이기도 하고, 본질적인 재능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대수롭지 않다. 내가 잘하고 싶긴 했지만, 그건 내 게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축구선수인데 농구 게임에서 잘 뛰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 아냐?’라는 생각이다. 나는 분명히 농구선수이긴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축구선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말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는 축구를 잘하니깐 농구는 못해도 돼.”라는 말이 된다. 일반화하면, 모든 재능을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해서, 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심지어 내 축구 재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는 있어도, 나만 내게 너그러워지면 그만이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니까. 누구 괴롭히지만 않으면 된다.
이런 생각 끝에, 재능을 가지고 싶다.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그랬듯 동경하되 좌절하고 있는 모습,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은 개발되지 않은 형태로 나에게 있다.’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제일 본질적인 형태의 재능인 것 같다. 나는 가끔은 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자존을 위해 필수적인 재능이고,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