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은 사전적으로는 종교의 맥락에서 숭배의 대상이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존경할만한 사람으로서 ‘내가 가고 싶은 지향점에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으로 정의해 보자. 우선 어떤 인자가 수직적, 위계적으로 존재하고, 그 인자의 활성 정도에서 나는 아래쪽에 있으며, 반대로 내 우상은 한참 위쪽에 있어서 경외심을 유발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멀리뛰기를 잘하고 싶은데, 멀리뛰기 국가대표를 본다면 경외심이 들고 그 사람이 우상이 된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지향점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후 그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정신적인 경지이다. 스스로에게 정당화된 확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일종의 자의식과잉 상태이지만 냉정한 메타인지를 겸해야 한다. 또 상황이 변한다면 유연하게 판단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신적인 경지에 도달한다면 내가 본성적으로 느끼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함과 번민이 해소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이미 그 정신적인 지점에 도착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집구석에서 폰으로 명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굳이 싯다르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동시대에서 정당화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정희원, 노홍철, 조던 피터슨, 피터 틸, 워런 버핏, 트럼프, 머스크 등. 이들은 자신만의 프레임과 규칙을 갖고, 그것을 기반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실제로 자신의 평판, 자산, 시간을 베팅했으며, 그 베팅이 나름의 성과를 거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이면에는 주류에서 벗어남에 있어서 수많은 제약과 비난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들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자신만의 프레임과 규칙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삶을 살아가며 경험적으로 획득되는 것 같다. 정희원은 노인내과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우리나라가 직면한 많은 건강상의 문제를 보고 이를 개선하려는 프레임을 갖게 된다. 피터 틸은 스탠퍼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류로펌에 들어갔으나, 불만족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일을 찾기 위해 퇴사한다. 이런 이야기에 따르면, 나와 내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나만의 프레임과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어떤 프레임을 가져갈 수 있을까? 남이 이야기해 준 것 말고, 내가 경험적으로 깨달은 진리는 뭘까? 앞으로 더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 것 같다.
나심 탈레브의 [Skin in the game]이라는 책이 있다. 자신이 책임을 안고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화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베팅한다. 투자자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워런버핏은 그의 가치투자철학에 따라 확신을 갖고 투자를 했고, 평생에 걸쳐서 그가 옳았다는 것을, 합리적인 추측을 해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워런버핏이 자신의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현실과 일치한다는 강한 확신이 없다면 그 수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확신은 어떻게 갖게 되는 것일까? 나의 합리적인 판단이 현실과 부합하는 경험이 많이 쌓이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에도 여전히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을까?
한편 주류에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이질적인 것을 싫어한다. 본능적인 거부감, 위기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방 문을 나가 퇴사선언을 하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사회적으로 설정된 코스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마 까무러치실 것이다. 사실 부모님처럼, 나도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이 있다. 사회적인 시선에 대한 부담이다. 일론머스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신호를 잘 캐치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비난을 견디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스퍼거는 아니지만 괴로움을 견디는 방법은 안다. 물리적으로 떨어지면 된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