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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Jan 11. 2019

지옥에서 온 악마의 인간계 적응기를 그린 웹툰

지옥 사원

소확행을 외치는 시대


저녁 약속 시각까지 시간이 남아 내가 자주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주문을 마치고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고 섰는데 진열대에 놓인 텀블러와 머그잔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여운 돼지가 그려져 있었다. 올해가 황금돼지띠 해라서 기획된 상품이었다.


‘꿀꿀이 돼지가 참 귀엽네.’

복스럽게 웃고 있는 돼지 삽화를 보며 돼지띠 해니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면 부자가 되려나 하는 논리 없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컵을 세 번쯤 들었다 놨다 하며 살까 말까 고민했다. 나는 '에이 쓸데없는 돈 쓰지 말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이유 없이 사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아무 근거 없는 기대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 이 정도는 사도 된다. 사치도 아니니까 소소한 행복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하나 사보렴.' 하며 악마가 속삭였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마침내 필요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려놓았다. 그렇게 악마의 유혹을 잠재우는 사이 금방 음료가 나왔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잔이랑 카페 이 층에 앉았다. 향긋한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던 몸에 따뜻한 커피가 들어가니 몸에 온기가 감돌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방금 본 머그잔에 그려져 있던 돼지 캐릭터처럼 발그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나란 인간은 참 쉽게 행복해지는구나. 이렇게나 단순한 나를 보니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현실은 동화같지 않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언제부터 ‘소확행'이란 말이 생긴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뭘 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동심을 잃은 사람들이 그냥 포기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릴 적 내가 읽었던 동화를 기억해보면, 그 속에는 항상 교훈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보상과 해피엔딩이 뒤따랐다. 동화 속에서는 선한 사람이 칭찬받았고, 악한 사람이 징계받았다. 한때는 나도 그런 동화의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도 통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백마 탄 왕자님이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현실은 동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천천히 인정했다. 인생에 동화 같은 일이라곤 없다는 걸 알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 안에 숨 쉬는 세포들이 그 사실을 서서히 깨우쳐갔다.


아기돼지 삼 형제를 읽던 꼬마 아이의 동심은 다 어디 갔을까?


아기 돼지 삼 형제를 현실적으로 바꾸어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셋째 돼지가 벽돌집을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아마 늑대가 와서 잡아먹는 속도가 빨랐을 테야. 부자 아빠에게 근사한 집을 물려받은 금수저 돼지는 튼튼한 집에서 살았지만, 흙수저 돼지는 지푸라기와 나무로 만든 집에 살았다는 이야기로 바꾸면 되겠지? 그마저도 은행에 빚을 잔뜩 지고 구한 집이라 흙수저 돼지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되겠다. 매일 밤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잠들어야 했다고.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하러 가야 했기에, 돼지는 그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이렇게 수정하면 참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겠군.'


열심히 일하며 청춘을 혹사해도, 내 집과 내 땅을 마련할 수 없으니까. 아기 돼지 삼 형제의 셋째 돼지같이 열심히 벽돌을 굽고 쌓는다고 해도 안락한 노후를 누릴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느새 나는 동화의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애초에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집을 지을 땅을 갖고 있었단 전제로 시작한 것부터가 현실성 없다며. 그렇게 삐뚤어진 생각을 했다. 황금돼지띠의 해인데 돼지저금통에 저축할 생각은 안 하고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안타까우면서도 웃겼다.

‘엉뚱한 상상을 엄청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게 웃기네. 도대체 그 많던 내 동심은 어디 간 걸까?’



에이 모르겠다. 욜로 하자.


뉴스에서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20~30대들을 조명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소확행을 선택한 게 아니다. 소확행이라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아서,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와 내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소소한 것에 눈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긍정 마인드를 끌어올리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차곡차곡 저축해서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은행 앱을 켰다가도 이자율을 보면 '어휴 어휴'하는 한숨이 깊어진다. 해맑게 살고 싶어도 현실을 부인할 수 없는 요즘이다. 미약한 연봉인상률과 치솟는 물가에 소스라치며 놀라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니 이제는 연말이 되면 저절로 쓴 미소가 지어진다. 가끔은 무기력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일까. 나에게 <아기 돼지 삼 형제>, <개미와 베짱이>, <토끼와 거북이> 같은 동화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모범답안만 늘어놓는 느낌이라 얄밉다. 예전이었으면 참 좋아했을 신데렐라 이야기 드라마를 봐도 '이런 뻔하고 현실성 없는 스토리가 있냐' 하며 냉대한다. 요즘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는 악마 같은 현실이 반영된 이야기가 와닿는다. 뼈 때리는 말일지언정 진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왠지 좋다.


여기 그런 내 마음을 저격하고 만 웹툰이 있다. 웹툰 <지옥 사원>이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주인공 고순무. 그는성실함의 교과서 같은 일상을 살았다. 밤낮없이 일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작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독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고순무'를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의 몸에 빙의한 악마의 눈을 통해 그에게는 허락된 건 '소확행'뿐이었다는 점을 짚어준다. 정녕 그가 누릴 수 있는 사치는 '호화로운 밥 한 끼'뿐이라는 씁쓸한 사실을. 그렇게 확인시켜준다. 그만큼 이 웹툰은 솔직하며 현실적이다. 정말 지독하게 솔직하지만 그래서 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지옥 사원>의 매력포인트

짜임새 있게 정돈된 창의력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웹툰 <지옥 사원>은 반짝반짝 빛나는 창의력이 담겨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있는 작품이다. 내용의 핵심은 지옥에서 온 악마가 한 인간에게 들어가 빙의한 후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는 이야기다. 줄여 말하면 '악마의 인간계 적응기'다. 내용이 사악하게 창의적이다. 그러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적당한 풍자가 녹아 있다. 판타지 같은 배경과 설정이지만, 이야기가 가볍거나 허술하지 않다. 인물, 사건, 배경이 모두 탄탄하게 설정되어 있다. 읽다 보면 묘하게 빠져드는 재미있는 웹툰이다.

1. 작품의 배경 세계가 매력적인 웹툰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 담긴 배경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 세계가 지옥이고 주인공이 악마라고 해서 알맹이 없는 판타지 만화일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지옥 세계고, 다른 하나는 인간계다. 인간계는 대기업 선호 그룹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기업 신입 사원과 임원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인간계의 이야기 곳곳에는 관료적인 기업의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가 담겨있다. 지옥계는 우리 사회의 부패한 권력 구조를 닮아있다. 지옥계에 사는 악마들은 계급이 체계적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분야의 권력을 가진 장관들은 자기들끼리의 권력 싸움에 젖어있다. 작품의 배경인 대기업 선호 그룹은 경제계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기주의를 폭로하고, 지옥계는 정치계에 만연한 권력 싸움을 고발한다.

2. 사회풍자적인 내용이 담겨있어 기억에 남는 작품

풍자와 해학이 있는 이야기는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이 그렇다.
여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개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건네는 대사는 코믹한 듯 보이지만 조용히 생각해볼 만한 화제를 던져준다. 대기업의 회장님, 회장의 외동딸, 임원들, 신입사원이 등장한다. 발렛파킹 일을 하며 재벌들에게 무시당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명문대를 졸업해 높은 스펙을 쌓았지만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다 특별채용으로 입사한 늦깎이 신입사원도 있고, 엘리트 코스를 거쳐 젊은 나이에 취업에 성공한 공채출신 신입사원도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 놓여있음에도 하나같이 불안해한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초조해하며 경쟁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린다. 그러면서 저마다의 이기심을 표출한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우리들이 매일 고상한 척 하면서 내면에 숨겨놓고 있었던 악랄한 본성을 꺼내어 보여준다. 악마보다 더 악랄한 인간들을 등장시켜 풍자한다. 만약, 절묘한 비유와 참신한 풍자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지옥 사원>을 보며 작품 속에 담긴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메시지를 즐겨보시라 추천한다.


3. 악마적 관찰자 시점에서 보는 재미가 있는 이야기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악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악마가 빙의한 인간 ‘고순무’다. 악마가 빙의한 인간의 경우 악마의 조종에 의해 행동하는데, 껍데기만 인간이고 그의 행동과 말은 악마의 본질을 갖는다. 그 악마는 한 발짝 떨어져 인간을 바라본다. 절대적인 타자의 시선에서 인간들을 관찰하고, 나름의 통찰력을 발휘해 인간들을 분석한다. 그 관찰자 시점이 독특하고 신선하다. 악마적 관찰자 시점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은 웹툰을 맛보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칠맛을 더해준다. 여기서 얻어지는 또 하나의 재미 포인트는 악마 '쿼터'의 시원하고 엉뚱한 대사들이다. 악마인 그는 지독하고 힘든 인간 세상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캐릭터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법한 직설적이고 순진무구한 대사를 팍팍 던진다. 가끔은 그의 돌직구 같은 대사를 보면 통쾌해지기도 한다. 참 유쾌하고 흥미로운 웹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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