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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모양 Mar 24. 2021

싸장님 감사합니다

남미 여행기 #19. 고마운 사람들

가장 생소했던 나라, 볼리비아. 그곳에서의 하룻밤을 현지 숙소가 아닌 한인 민박을 잡은 건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덜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숙소 선정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한 탁월한 결정이었다.


야간 버스가 우리를 볼리비아 한가운데 내려주고 떠났을 때, 민박집 사장님께서 문자를 주셨다.

‘도착하시면 로키 호스텔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픽업 가는데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스산한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사장님께 답장을 하고 기다릴 자리를 살폈다.


“사장님이 곧 오신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하시네요. 우리 안에서 기다려요.”


우리는 밝은 곳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 판단하고 호스텔 안쪽 로비에 앉았다. 마치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들처럼 초조해하면서 세 어른은 찍소리 않고 사장님을 기다렸다. 나는 태연하게 스마트폰을 보는 척하면서도 불안한 눈초리로 사방을 경계했다.


한 시간 같은 십 분이 지났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앉아있는 한국인 셋을 발견한 민박집 사장님께서 “데보라 민박 손님이시죠? 늦어서 죄송합니다.”하면서 나타나셨다. 한국말이다. 경직돼있던 몸과 표정이 일순간에 풀렸다.


우리 세 사람은 “괜찮아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평정심을 찾은 우리는 새끼오리가 어미 오리 뒤를 쫓듯이 한인 민박집 사장님을 졸졸 따랐다.

털썩.

트렁크에 짐을 싣고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를 차례로 차에 태웠다.


볼리비아의 도로는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장님은 그런 울퉁불퉁한 도로 위로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죄송해요. 제가 한국에서 오늘 막 들어와서 좀 늦었어요.”

“사장님 오늘 입국하신 거예요?”

“네. 도착해서 집에서 잠시 눈 붙이다가 나왔어요.”

사장님은 잠시 휴가로 한국에 들어갔다가 그날 막 볼리비아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운전대를 잡고 계신 사장님의 호흡이 짧고 빠르게 들렸다. 숨쉬기가 살짝 버거우신가. 오래간만에 돌아와 시차 적응과 산소 적응이 완벽히 되지 않으셨나. 얼굴에 피곤이라 쓰여있는 사장님을 보니 잠시 죄송했다. 이내 그 미안함은 감사로 바뀌었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픽업을 나와 주신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났겠군. 도착한 날은 손님을 안 받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예약을 받아주시고 데리러 와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나는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주시는 사장님께 그 마음을 담아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숙소에 들어가니 인상 좋은 사모님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사모님과 사장님은 간단하게 숙소 구조를 안내해주시고, 식사가 곧 준비되니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하셨다.


2층짜리 주택으로 되어있는 숙소는 아늑하고 흠잡을 곳 없는 민박집이었다. 게다가 그날의 숙박객은 우리 셋뿐이었다. 넉넉하게 샤워하며 묵은 먼지와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냈다. 세 사람의 얼굴이 꼬질꼬질한 몰골에서 다시 뽀송뽀송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꿉꿉함을 씻어내니 배고픔이 밀려왔다. 후각이 되살아난 나는 폴폴 풍기는 음식 냄새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에는 이미 먹음직스러운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기다리고 계시던 사모님이 우리가 앉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밥을 퍼서 가져다주셨다.


“잘 먹겠습니다.”

목청 높여 인사를 드렸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집밥 앞에서 절로 어깨춤이 났다.


숟가락과 젓가락질이 시작되고, 음식은 순간 사라졌. 깨끗이 비운 그릇을 드리니 사모님이 다시 나오셔서 비행기 시간을 물어보셨다. 그리고 어디를 가면 좋은지와 어떻게 돌아와  시에 공항으로 출발하면 되는지를 일일이 알려주셨다. 덕분에 우린 다음  일정을 신속하게 논의하고 바로 잠자리에   있었다.


사장님 부부는 원래 볼리비아에서 가죽 공장을 오랫동안 운영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이들도 다 컸으니 이제 공장일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한인 민박을 해보라는 딸의 권유를 듣고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아들과 딸이 사용하던 빈방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과정 없이 시작하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누가 올까 하는 반신반의한 마음이셨다고 한다. 큰 기대 없이 여행카페와 남미 여행객들의 채팅방에 글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한국인 남미 여행객들에게 연락이 왔고, 그렇게 바로 다음 날부터 민박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안전한 민박집을 찾는 우리 같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라파스의 한인 민박집은 큰 희소식이었다. 볼리비아 라파스는 두려움이 큰 지역이니까. 처음 이 민박집을 발견했을 때, 겁에 질려 꽥꽥거리다가 어미 새의 둥지를 만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여행객이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숙박비가 전혀 아깝지 않다 생각했을 테야. 데보라 한인 민박은 그럴만한 값어치를 하는 곳이다 정말.


그날 밤. 나는 엄마품에 안긴 코알라처럼 두 다리 쭉 뻗고 깊은 잠을 청했다. 야간 버스에서 쌓였던 피곤은 싹 날아갔다. 익숙한 한국말로 우리를 반겨주신 사장님과 사모님 덕분에 하나도 무서운 게 없는 밤이었다.


‘사장님 잘 먹고 잘 쉬고 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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