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20. 높은 곳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라파스는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다. 여행 책을 보아도 블로그 후기를 보아도 딱히 볼 것 없는 도시라는 평이 대다수였다. 우유니를 가려는 남미 여행자들이 비행기나 버스 승차를 위해 들러 하루정도 쉬고 가는 도시였다.
우리도 활력을 충전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일정 중간에 라파스에서의 하루를 끼워 넣었다.
우리에게는 반나절 정도의 짧은 관광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시간.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며 도시를 탐색해보기로 했다. 라파스의 대중교통인 케이블카를 타보기로 했다.
한인민박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노란색 텔레페리코를 탈 수 있는 정거장에 우리를 내려줬다.
곧바로 매표소에 가서 손가락으로 3명을 말하고, 검지 손가락으로 우리가 내릴 정거장을 가리켰다. 매표소 직원이 우리말을 척척 알아듣고 우리에게 탑승권과 잔돈을 전해주었다. 우리 세 사람은 순탄하게 개찰구를 통과하고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승용차 한 대 정도 크기의 칸에 모르는 사람 두 명과 함께 탔다. 아주 시끄럽게 떠들기에는 좀 어색한 공간. 침을 꼴깍 삼키고 조용히 있었다. 이내 문이 닫히고 케이블카가 공중부양을 시작했다.
‘지금 이 줄 한가닥에 의지해 우리가 매달려있다니. 이 높은 도시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밑에는 아무것도 거칠게 없다니….’
주먹을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에서 끼인 탑승권이 구겨졌다. 얇은 종이 한 장. 그 얇은 탑승권이 나에게 어떤 마음을 선사할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케이블카가 위를 향해 갈 때, 주변에 펼쳐지는 광경을 살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케이블카. 나란히 이동하고 있는 그 모습이 앙증맞게 보였다. 뭐야 귀엽잖아.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속도를 느끼며 동글동글한 케이블카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살폈다. 그런데 발아래 보이는 마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여행 전에 찾아본 볼리비아에 대한 위키피디아 결과가 생각났다. ‘아 이제부터 부촌에서 빈민촌으로 접어들었나 보다’하는 감이 왔다.
라파스의 중심가는 해발 3600m의 높이에 절구 모양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절구의 바닥 부분에 고소득자가, 가장자리 부분에 저소득자가 산다.
위키피디아에서 배웠던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특정 지점을 지나고 나니 방금 전까지 보이던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사라지네. 여기서부터는 촘촘하고 구불구불한 마을 전경이 보이네. 그래. 여기서부터 못 사는 동네인가 보다. 생각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부촌에서 빈촌으로 변경됩니다 하는 안내 음성이 나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라파스구나. 가빠지는 호흡으로 고도의 변화를 느끼며 두 눈으로는 빈부 격차를 바라보며 그렇게 종착역을 향해 올라갔다.
빈과 부의 경계를 지켜보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참 웃기는 일이네. 한국에서는 고층이 비싼데. 여기는 반대구나. 이 남미 여행은 참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여행이네. 참.’
라파스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 보다 숨 쉬고 살기 힘들다는 게 더 어울리는 곳이다. 그만큼 산소가 희박하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척박한 위쪽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곳에는 헐떡이는 숨을 참아가며 마을을 오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케이블카 승차권 요금이 부담스러워 두 다리로 이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었다. 아등바등하며 숨 가쁜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속이 불편했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집었다. 입술이 메말라서 뜯어지고 피가 났다.
그렇게 잠시 불편한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를 태운 케이블카가 금방 꼭대기 정거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나는 너무나도 가뿐하게 윗동네에 발을 디뎠다. 열린 문을 통해 폴짝 뛰어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정상에 올라가도 딱히 볼만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우리는 그냥 아래 동내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와 비행시간에 맞춰 볼리비아를 떠났다.
비행기가 라파스 공항을 뒤로하고 붕 오르는데, 높은 곳을 너무 쉽게 올라가는 것 같아 마음이 이상했다. 구름의 도시. 라파스. 헐떡이는 심장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탄 승객들을 부러워했던 내가 문득 부끄러웠다. 지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가 괜스레 얄미워졌다. 갑자기.
좀처럼 노래가 듣고 싶지 않았다. 백만 원을 호가하는 스마트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고, 몇 백만 원을 쏟아 비행기표를 끊고, 지구 반대편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마냥 행복하게 유유자적하기가 싫었다. 여행의 두근거림을 담은 노래를 멈추고 조용한 노래를 반복해서 틀었다. 작은 소리로 들리는 노래가 움틀거리는 그 이상한 감정을 좀 잔잔하게 진정시키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그날은 조용히 무거운 비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