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려 노력한다. 과학은 단지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 않고 ‘매일 2시간씩 한다’는 표현으로 열심히 하는 것의 구체적인 정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과학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것은 완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은 구체적인 경험 후에 더욱 추상적인 개념이 되기도 한다. 개별적인 구체적 경험은 오히려 사랑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지만,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과 허세를 정의하려는 사람들도 같은 고민에 빠질 수 있다. 과학은 허세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려고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는 쉽지 않다. 허세는 추상적인 개념일 수 있지만, 허세를 부리는 개개인에게 그 순간은 매우 구체적인 행위일 수 있다. 누군가는 건강에 대한 허세를 부리고, 누군가는 시간에 대한 허세를 부린다. 지금 막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한 사람이 “다시 한번 뛰라고 해도 자신 있어.”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허세는 구체적이다. 오늘 자정까지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저녁 모임에서 “괜찮아. 2시간이면 충분히 하고도 남아.”라고 허세를 부리는 여유도 구체적이긴 마찬가지다. 허세처럼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개념에 대한 정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내는 방법을 통해 전체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른바 귀납적 추론이다. 사람들은 어떨 때 허세를 부리다고 하는지, 그런 경우 어떤 공통점을 갖는지 살핀다면 허세의 정의에 접근할 수 있다.
허세의 정의가 고민스러운 것은 원래의 의미보다 확장됐고, 확장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도 추가됐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특정 재능이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글씨를 정갈하게 잘 쓰거나 암기를 잘하는 것이 직업적으로 유용한 기술이었으나, 요즘은 필기나 암기 능력의 유용함이 직업적으로 많이 축소되었다. 허세는 대부분의 시대에서 특별한 단어가 아니었으나, 근래에 주목받는 단어가 되었다. 방송에서 허세 행위를 캐릭터로 활용하는 출연자가 인기를 끌었고, 인기는 다양한 현상으로 파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세의 부정적인 의미는 축소되고 긍정적인 의미는 확장되었다. 사람들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은 일종의 놀이이자 의사소통 코드로 작용했다. 허세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확장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의미의 허세를 최초로 발생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누군가는 배우 최민수를, 누군가는 배우 장근석을 지목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허세의 의미에 새삼스러운 바람을 일으켰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들도 어떠한 맥락에 따라 ‘허세’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허세 행위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떤 뜻이 하늘에서 이들 앞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허세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허세를 부리는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래 정확한 발원지를 따지는 것은 허세를 정의하는데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세를 정의하는 사람들은 허세를 어떻게 정의했고, 그 정의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먼저 허세에 대한 오래된 연구는 대학생들의 허세 부리기에 조사했다. 1928년 미국의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틸린과 스콧은 시험 문항에 자신들이 허구로 만들어낸 내용을 추가한 후 대학생과 대학생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문제를 풀게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상세계와 관련된 개념 중 설명이 잘못된 것은?
1. metaverse: 현실세계와 같은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 가상세계
2. digital twin: 현실세계의 기계나 장비, 사물 등을 컴퓨터 속 가상세계에 구현한 것
3. VR(virtual reality): 가상의 세계에서 실제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4. VSL(virtual standard language): 가상 세계에서 구축되고 있는 기호화된 표준 언어
위에 제시된 개념 중 VSL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를 만들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개념이다. 가상세계에서 기호화된 표준 언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시된 개념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왠지 있을 법한 개념으로 느껴질 수 있다. 틸린과 스콧은 이런 함정이 곳곳에 있는 문제를 만들었고 이 함정에 많이 빠질수록 허세를 부리는 정도가 크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처음부터 허세에 대해 ‘실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후 조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구를 정답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을 선택한 것이니 일종의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힌 것이고 이러한 심리적 상태와 행위를 허세로 파악한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연구지만, 틸린과 스콧은 그 시절 대학생들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고한다. 시험에 응시한 학생 중 절반은 만들어진 13개의 내용 중 6개 이상을 정답으로 선택했다. 분명히 모르는 내용인데 정답으로 선택한 것이다. 대학생의 허세는 함께 시험에 응시한 일반인 집단과 비교하면 훨씬 흥미롭다. 일반인의 약 20%만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했으며, 7%는 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내용을 단 한 개도 선택하지 않았다. 시험에 응한 일반인은 서비스업, 세탁업, 운전기사, 관리자, 공업 기사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틸린과 스콧은 나이가 어릴수록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했는데, 일반인이 직업을 가진 이들이라면 대학생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사회 경험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했을 때의 부담과 책임을 느꼈을 수 있다.
틸린과 스콧의 조사를 더 소개하자면, 100여 년 전 대학생들은 남자 신입생일 경우 허세를 가장 심하게 부렸다고 한다. 물론 모든 귀납적 추론이 그렇듯 이 연구의 결과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더구나 모르는 문제를 안다고 했다는 것으로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면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남녀, 대학생과 일반인, 다양한 연령과 모든 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신입생 남자가 가장 아는 척을 많이 하고, 신입생 여자에 비해 2배 정도 더 아는 척을 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일이다.
그렇다면 허세를 부리는 것이 성적이나 지능과 연관이 있을까? 흔히 진짜 부자들은 부를 드러내지 않고, 높은 학문적 지식을 쌓은 사람들은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것이 진짜라면 굳이 그것을 가진 척할 필요가 없고, 그런 것으로 일상이 채워져 있으며 새삼스럽게 언급할 일도 없다. 허세를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까? 이 연구에서 최상급 성적의 학생은 허세를 많이 부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아는 척할 일이 많지 않은 것이다. 반면 평균 지능을 살짝 웃도는 학생들이 가장 많은 허세를 부린다는 결과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집단을 특정 기준으로 계급화할 때 중상 계층으로 구분 지어지는 집단은 중간 이상에 속한다는 자부심과 최상위 집단에 대한 열등감이 공존할 수 있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이들에게는 과시적 성향이 나타나는데, 이런 성향이 허세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중간 계급을 향해 ‘난 너와 다름’을 말하고, 상위 계급을 향해 ‘나도 너만큼 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100여 년 전, 틸린과 스콧은 실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것을 허세로 정의했다. 그런데 얼마나 더 많이 아는 척을 해야 허세일까? 10개를 알고 있는데 30개를 아는 척하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거짓을 넘어 사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허세를 부리는 행위에 대해 살짝 어이없어 하지만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경찰에 고소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100여 년 전의 연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참고자료
Thelin, E., & Scott, C. (1928), An Investingation Of Bluffing. The American Journal Of Psychology. 40(4), 613-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