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밤의 서재

화이트 칼라 소시오패스 : 피 묻지 않은 칼

by 흔들리는 전문가

부제 : 시스템이 수여한 면죄부, 그리고 포상받은 방관자들


범죄 현장에는 늘 냄새가 있습니다. 낡은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에서 나는 곰팡이와 혈액의 비릿한 냄새, 혹은 방화 현장의 매캐한 기름 냄새. 우리는 그 후각적 단서를 통해 사건의 참혹함을 직관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펼쳐 보일 사건 파일에서는 아무런 악취도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디퓨저 향기와 갓 내린 커피 향, 그리고 서늘하도록 쾌적한 에어컨 바람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가장 세련된 살인은 넥타이를 맨 채, 법전(Code of Law)을 흉기 삼아 벌어집니다.


오늘의 기록은 2026년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그늘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러나 법적으로는 ‘사건’조차 되지 못한 어느 죽음에 관한 재구성입니다. 뉴스 한 켠에 단신으로 처리된 방송계 프리랜서의 부고와, 그 죽음을 방치한 행정 부서가 ‘우수 기관’으로 포상받았다는 기막힌 아이러니.

이 두 가지 사실을 모티브로 하여,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는 ‘화이트 칼라 소시오패스’의 민낯을 드라마 형식으로 복기해보려 합니다.

이 글은 그들의 알리바이를 깨트리기 위한 심리학적 공소장입니다.


Scene 1. 온에어(On Air), 혹은 질식의 시간

오전 6시. 방송국 분장실의 거울 앞에 앉은 서지은(가명, 29세 기상캐스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동공은 초점을 잃었고, 목 주변에는 붉은 발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전형적인 신체화 장애(Somatization Disorder). 극도의 스트레스가 신체 증상으로 터져 나오는 단계입니다. 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최 부장(가명, 40대 후반 보도국장)의 메시지가 떠 있습니다.


"오늘 의상, 좀 그렇지 않나? 우리가 예능 찍는 것도 아니고. 프로답게 하자, 응? 지은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폭언은 없습니다. 욕설도 없습니다. 겉보기엔 후배를 걱정하는 선배의 조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서지은은 이 메시지를 읽는 순간 호흡이 가라앉는 것을 느낍니다. ‘지은 씨를 위해서’라는 말은 지난 2년 동안 그녀의 자존감을 난도질해 온 칼날의 손잡이였습니다.

최 부장은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그는 회의실에서 가장 온화한 목소리로 서지은을 고립시켰습니다.


“지은 씨는 우리 가족이잖아. 그런데 계약서는 프리랜서니까, 출입증은 반납하고 매일 방문증 끊어서 들어와야겠네? 보안 규정이 바뀌어서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막아보려고 했는지 알지?”


가족이라 부르며 헌신을 요구하되, 권리는 외부인으로 선을 긋는 화법. 그는 서지은이 새벽 4시에 출근해 원고를 쓰고, 그래픽을 의뢰하고, 방송을 하는 모든 과정을 ‘당연한 열정’으로 포장했습니다. 서지은이 과중한 업무를 호소할 때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계산이 너무 빨라. 지은 씨는 다를 줄 알았는데. 밖에서 줄 서 있는 지망생이 몇 명인지 알아요?”


그것은 단순한 갑질이 아니었습니다. 서지은이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격하시키는 심리적 살해였습니다.


Scene 2. 심문의 방, 그러나 가해자는 없다

서지은이 사망한 후, 유족과 동료들은 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을 넣었습니다. 최 부장이 그녀에게 가한 업무 배제, 공개적인 망신, 그리고 교묘한 따돌림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조사 과정은 또 다른 폭력이었습니다. 조사실의 풍경은 건조했습니다. 근로감독관은 서지은이 남긴 업무 일지와 녹취록을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게 좀 애매해요. 고인이 프리랜서 계약을 맺으셨잖아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이 되어야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하는데, 출퇴근 시간이 고정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사측에서 나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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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억, 진실과 왜곡 사이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을 저서 《뇌의 배신》, 《흔들리는 전문가》 시리즈를 통해 서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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