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전문가의 심리노트 #11

11화 전문가도 상담을 받아야 할까?

by 흔들리는 전문가

치료자의 흔들림, 그리고 자기치료의 윤리

“그럼 선생님도 상담 받아요?”
내담자들이 가끔 묻는다. 나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나도 사람인데요.”

그 말을 하며 한숨처럼 웃을 때, 내담자는 종종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확신한다.
상담자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전문가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감정들

우리는 흔히 치료자를 ‘마음의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 말 안에는 마치 이 사람이 자신의 감정은 완벽히 조절할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늘 따뜻하고 공감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치료자도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무기력해지고, 때로는 자신의 삶이 흔들릴 때가 있다.

심리상담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감정의 자극’에 많이 노출되는 삶을 의미한다.
타인의 고통을 반복해서 듣는다는 것.
그 감정을 자신의 내면에 저장하고 소화해야 한다는 것.
상담이 끝난 후에도 마음에 남는 ‘잔상’들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이런 감정의 무게는 시간이 지나며 무의식에 쌓이고, 언젠가는 ‘심리적 탈진’ 또는 **‘이차 외상’**으로 번질 수 있다.


� 실제 사례 – 치료자의 탈진

몇 년 전, 나는 중독클리닉에서 일하던 시절, 매주 15건이 넘는 심리평가와 상담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중 절반은 음주운전, 성범죄, 가정폭력 등의 의뢰 사례였고, 대부분이 방어적이고 비협조적인 내담자들이었다. 처음엔 문제없이 해냈다. 훈련받은 전문가였고, 수치와 도표, 심리검사 해석에는 익숙했다.

그러나 어느 날, 로르샤흐 검사를 해석하던 중, 문득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예전 같았으면 반응 하나에도 ‘이 사람은 어떤 고통 속에 있구나’ 하고 상상하며 읽었을 것이다.
그날은 아니었다. 마치 종잇장처럼, 피상적으로 보고서를 쓰고 있는 나 자신.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고장 나고 있구나.”

그리고 나도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상담자를 위한 상담 – 윤리이자 책임

상담자가 상담을 받는다는 건, 윤리적으로도 중요하다.
한국상담심리학회,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윤리강령, 미국심리학회(APA) 윤리 기준 등은 모두 “자기돌봄(self-care)”, “전문가로서의 자기관리 능력”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감정 조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상담자가 개인적인 심리적 어려움으로 인해 내담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여 ‘내담자의 심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이다.

치료자의 상담은 자기치유를 위한 것이면서도, 내담자에게 안전한 상담을 제공하기 위한 ‘전문가의 윤리적 책임’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상담할 수 없다

많은 초심 상담자들이 착각한다.
“나는 심리학을 공부했으니, 내 문제는 스스로 다룰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다.

진짜 상담은 다른 시선으로 내 감정을 비추는 일이다.
스스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방어, 회피, 반복되는 감정의 패턴을 다른 전문가의 질문을 통해 드러내고 해석해 가는 과정이다.
내 안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는 ‘타자의 공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1년에 한 번씩은 정기적인 슈퍼비전이나 자기 상담을 받는다.
치료자의 자리를 오래 지키고 싶다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유지 장치’에 가깝다.


치료자도 인간이다 – 흔들릴 수 있는 권리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담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도 힘들 때가 있어요. 사람 마음은 누구에게나 어렵죠.”

그 말은 내담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게도 하는 말이다.
전문가이기 이전에 나 역시 감정이 있고,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상담실 안에서 ‘치유자’로 존재하지만, 상담실 밖에서는 누군가의 배우자, 자녀, 친구, 동료로 살아간다.
그 일상 속에서 부딪히고 상처받고 또 회복하는 그 경험이, 상담실 안에서 진짜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흔들림이 나를 더 깊은 전문가로 만든다

나는 상담자들이 더 많이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다.
혼자서 참고, 견디고, 자신을 숨기며 버티는 게 ‘전문성’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다.

흔들린다는 건, 내가 여전히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고, 다독이고 돌아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상담자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 작가의 메모
치료자도 상담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감정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으니까요.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 타인을 돌볼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약함이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성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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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 죄책감. 감정의 이중성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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