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말하지 못한 감정, 침묵과 회피의 언어
상담실에는 많은 말이 오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을 한 말보다, 말하지 못한 말에 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일 때, 실제로는 그 ‘사이’를 듣고 있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 고개 숙인 침묵, 망설임, 그리고 때때로 터지는 웃음 속에 숨어 있는 감정들.
말은 마음의 대표이지만, 모든 마음이 말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감정일수록, 언어화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하지 못한 감정은 침묵이라는 형태로, 회피라는 전략으로, 혹은 농담이라는 가면으로 드러난다.
한 여고생 내담자는 상담 내내 밝고 명랑했다. "저는 괜찮아요. 친구도 많고, 요즘은 뭐... 그냥 그래요."
그러나 말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고,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었으며 손거스러미를 뜯어 열손가락 끝을 빨갛게 부어 있었다..
몇 주 후, 그녀는 문득 털어놓았다.
“사실, 아무도 내가 진짜 우울한 줄 몰라요. 괜히 걱정하게 하기 싫어서요.”
그녀의 '괜찮다'는 말은 보호막이었다. 그 말은 타인을 위한 배려이자, 자기 방어였다. 우리는 웃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웃음은 종종 슬픔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 그림자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성인 여성 내담자는 상담 초반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여도 짧은 대답으로 돌아왔고, 침묵이 길어졌다. 상담자로서 초조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을 깨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느끼는 걸 그대로 가져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몇 회기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사실 예전에 상담을 받을 땐 자꾸 말을 시켜서 더 불편했어요. 말로 표현하면, 그 감정이 너무 커질까 봐 무서웠어요.”
그녀에게 침묵은 감정을 봉인하는 장치였다. 말하는 순간, 마음속 상자 안에 있던 감정들이 흘러넘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상담은 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올 수 있을 만큼의 안전함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나는 심리검사를 통해 평가자의 자리에 선다. 심리검사에서는 숫자와 지표, 반응시간과 문항 점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 속에서도 **'비어 있음'**은 메시지가 된다.
예컨대, 문장완성검사(SCT)에서 ‘당신은 ______’라는 문항을 비워둔 사람이 있다. 또는 '나는 언젠가 ______’이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답한 경우도 있다(예시입니다).
비워진 문장은 공백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정이다. 말하지 않음은 모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일 수도 있다. 평가에서조차, 말의 부재는 말보다 더 많은 정보를 준다. 나는 그 공백을 해석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 문항이 어려우셨나요?” 그러면 내담자는 종종 이렇게 답한다. “그냥...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뭘 느끼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 답변은 진심이다.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데는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다.
상담자는 때로 무력감을 느낀다. 말이 없는 내담자를 만나면, '내가 뭘 잘못했나?', '어떻게 해야 더 끌어낼 수 있을까?'라는 자책이 찾아온다. 나 또한 수차례 그런 자리에 앉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이다.
내담자의 침묵은 상담실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저항’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과거의 고통을 말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고, 누군가는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과도하게 수다를 떤다. 그 모든 전략은 그 사람의 생존 방식이다.
전문가는 그 방식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존중하는 태도다.
감정이 곧바로 말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감정 표현을 억제당한 사람들, ‘착한 아이’로 자란 사람들일수록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화나면 그냥 참아야지”, “너는 좋은 아이잖아”라는 말은 감정을 통제하는 법만을 가르쳤고, 이해하는 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상담실에서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다. “그건 화였을까요, 슬픔이었을까요?”와 같은 질문은, 감정의 언어를 다시 획득하는 과정이다. 말로 표현된 감정은 비로소 처리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말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 치료자의 기쁨이다.
상담은 말을 듣는 일이 아니다. 말 너머의 감정을 듣는 일이다.
그리고 침묵은 가장 복잡한 언어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그 침묵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 침묵 뒤에는 언젠가 꼭 만나야 할 ‘진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감정의 뿌리와, 우리가 감정을 왜곡하거나 억압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