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웃고 있는데 경고등이 뜨는 남자

5화. 스마일 증후군과 시스템의 파업 선언

by 흔들리는 전문가

상담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면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영양제 통을 찾는다.


이 시간은 임상가에게 ‘마의 구간’이다. 점심으로 먹은 탄수화물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뇌를 공격하고, 오전에 쏟아부은 ‘공감 에너지’의 잔량이 바닥을 드러내며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시간.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때의 나는 고도로 훈련된 ‘리액션 봇’에 가깝다.


"아, 그러셨군요", "많이 힘드셨겠네요"를 입력된 알고리즘대로 출력하는 기계.


나는 카페인을 수혈하며 다음 내담자의 차트를 모니터에 띄웠다.


강민재. 36세. 대기업 기획팀 과장. 신청 사유: 사내 복지 포인트 소진 및 인사팀 건강검진 권고.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 걸렸다.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라, 회사가 등 떠밀어 보낸 케이스. 이런 분들은 대개 진료실 문을 열 때부터 ‘방어 태세’를 갖추고 들어온다. 마치 "나는 멀쩡한데 회사가 시끄러워서 와줬다"는 것을 온몸으로 웅변하듯이.


"똑똑."

노크 소리마저 경쾌했다. 보통 여기 오는 사람들의 노크는 둘 중 하나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거나, 빚쟁이처럼 문을 부술 듯 두드리거나. 그런데 이렇게 리듬감 넘치고 정중한 4분의 3박자 노크라니. 나는 직감했다. 아, 오늘 내담자는 '프로'구나. 사회생활 만랩의 기운이 문밖에서부터 느껴졌다.


"네, 들어오세요."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고,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려야 했다. 내담자의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이 난데없이 발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내담자 머리 위에 얌전히 떠 있어야 할 상태창이, 마치 주파수 안 맞는 구형 브라운관 TV처럼 지직거리며 노이즈를 뿜어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예약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는데 괜찮으신가요? 혹시 제가 식사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는 웃으며 들어왔다. 아니, ‘웃음’이라는 가면을 완벽하게 착장하고 입장했다. 걸음걸이는 모델처럼 당당했고, 수트핏은 맞춤 정석이었으며, 넥타이는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중앙에 위치했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성우 아카데미 중급반 이상 수료한 듯한, 신뢰감 주는 중저음의 톤. 너무 밝아서 부담스럽지도 않고, 너무 어두워서 처지지도 않는, 대한민국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정상인’의 표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 네. 아주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나는 짐짓 태연한 척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허공을 향했다. 상태창이 미친 듯이 오류 메시지를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시스템 로딩 실패... ] [ 심각한 데이터 불일치 감지 ] [ 경고: 이 대상의 '안면 근육 데이터)'와 '심층 심리 데이터)'가 전혀 매칭되지 않습니다. ] [ 시스템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


보통 상태창에는 숫자가 뜬다. 우울 지수 70, 불안 지수 80, 자존감 레벨 2. 이렇게 명확한 수치가 나와야 내가 진단을 내리고 상담을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오늘 이 망할 시스템은 파업이라도 선언한 모양이었다. 숫자는 없고, 그래프도 증발했다. 대신 윈도우 블루스크린 같은 칙칙한 회색 바탕에 단 한 줄의 문장만이 껌뻑거리고 있었다.


[ 시스템 알림: 대상이 자신의 상태를 '매우 양호(Very Good)'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음. ]


주장하고 있음, 이라는 단어가 내 신경을 긁었다. 야, 상태창. 너는 내담자의 무의식을 엑스레이처럼 찍어내는 기계잖아. 내담자가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를 받아 적는 서기가 아니라고. 이건 마치 용의자가 작성한 "저는 죄가 없습니다"라는 진술서를 판사가 그대로 읽고 있는 꼴이었다.


"선생님, 저 사실 진짜로 별일은 없는데요. 그냥 회사 복지 포인트가 남아서요. 안 쓰면 소멸된다니까 아깝잖아요. 저 말고 진짜 힘든 분들이 오셔야 하는데, 제가 괜히 귀한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죄송하네요. 하하."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나를, 아니 전 인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담자가 의사의 업무 과중과 다른 잠재적 환자들의 기회비용까지 걱정해 주는 이 훈훈한 상황. 나는 속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윤활유처럼 사용하는 전형적인 K-직장인의 화법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완벽한 미소로 코팅되어 있었다. 입꼬리는 정확히 15도 각도로 올라가 있었고, 눈가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주름이 적당히 잡혀 있었다. 저건 자연 발생적인 웃음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수천 번은 연습해야 나올 법한, 아니, 어쩌면 조물주가 빚을 때 실수로 웃음 버튼을 눌러놓고 고정시켜 버린 것 같은 안드로이드형 미소였다.


"민재 씨, 요즘 기획팀 많이 바쁘시죠? 시즌이라 야근도 잦을 텐데요."


내가 가볍게 잽을 날려보았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부장님의 만행을 성토하는 대하드라마 한 편을 읊어야 정상이다.


"에이, 다들 바쁘잖아요. 저만 유별나게 힘든 것도 아닌데요, 뭐. 그리고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회사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니 감사한 일이죠. 제가 인복이 있어서 팀원들도 다 좋고요. 하하."

이 문장은 위험하다. 심리학 교과서에 빨간 줄을 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 상담실에서 "나는 괜찮다", "감사하다", "남들도 다 그렇다"는 말이 쓰리콤보로 나오면 대개 마음속 비상벨을 눌러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비상벨 대신, 시스템이 렉 걸린 286 컴퓨터처럼 버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직- 띠링. 그의 상태창에 새로운 문장이 꾸역꾸역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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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억, 진실과 왜곡 사이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을 저서 《뇌의 배신》, 《흔들리는 전문가》 시리즈를 통해 서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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