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평가 불안, 그리고 동결의 탄생
오후 2시 14분.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건조한 키보드 소리, 익숙한 형광등 불빛. 그러나 지훈의 세계는 그 찰나에 멈췄다. 상사에게 보낸 기획안 파일명 하나. ‘기획안’이어야 할 단어가 ‘기힉안’으로 잘못 적혀 있었다.
누군가에겐 사소한 오타일 수 있다. 하지만 지훈에게 그것은 생존의 궤도에 생긴 균열이었다. 그 순간 뇌는 판단을 멈췄다. 편도체가 경보를 울렸고,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으로 향하던 혈류는 급격히 차단됐다. 시야는 좁아졌고, 손끝은 차가워졌다. 심장은 요동치다 이내 가라앉았고, 자판 위에 올려진 손은 단 한 밀리미터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몸은 이미 멈추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 동결은 처음이 아니었다. 마비된 의식은 스무 해 전, 여덟 살의 어느 오후로 되돌아간다. 학교 운동장에서 배트에 공이 맞던 순간, 아이들의 환호, 완벽한 포물선. 그러나 그 궤적의 끝에서 들려온 파열음. 깨진 교실 창문 소리와 함께 지훈의 세계는 뒤집혔다.
“내일 부모님 모시고 오렴.”
그 말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관계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지훈의 집에서 사랑은 조건부였다. 성과는 안전을 보장했지만, 실수는 침묵과 실망으로 돌아왔다. 잘못은 곧 박탈이었다. 그날 지훈은 집으로 가지 못했다. 대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난간 너머의 허공보다 두려웠던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올 아버지의 발소리와 술 냄새 섞인 숨결이었다.
그는 정말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를 멈춘 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었다. 뛰어내리는 일조차 ‘완벽하게 실패’할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자신이 사라진 뒤 부모가 겪을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과도한 책임감이었다. 지훈은 추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날 옥상에서 그의 일부가 동결되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흐르기를 멈추는 법.
완벽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규칙.
그 규칙은 그날 이후 지훈의 신경계에 저장되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사무실과 회의실에서 그 감각은 반복된다. 사소한 실수 앞에서도 뇌는 ‘종말’을 호출한다. 그래서 지훈은 싸우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는 멈춘다. 감정을 끄고, 존재감을 줄이고, 위험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 방식으로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지훈의 완벽주의는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이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버려진다”는 명제에 묶인 생존 전략이었다.
치료는 그를 더 유능하게 만드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이 멈춤이 왜 필요했는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결은 회피가 아니라, 더 큰 파괴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평가받지 않는 안전한 공간에서, 실수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경험이 반복될 때, 옥상에서 멈춰 있던 시간은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옥상을 품고 산다.
어떤 기준에서 단 한 밀리미터만 어긋나도, 몸이 먼저 얼어붙는 이유다.
이 글은 『뇌의 배신』 Part 1의 일부 기록입니다. 원문은 유페이퍼 무료 공개본으로 보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