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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Aug 01. 2024

그들에겐 가끔 날개가 보인다 2

- AI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데자뷔인가, 복직한 이듬해 5월, 훈이와 똑같은 얼굴을 만났다. 하지만 처음 만날 때와는 완전 딴판. 그 얼굴이 웃고, 배꼽손을 하고 머리를 꾸벅하더니 심지어 내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세상에, 정말 훈이니? 나를 기억해?”

 “그럼요. 작년 처음 선생님이시잖아요.”     


 1년 전, 일주일 남짓 만났을 뿐인 나를 고맙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생채기 없이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는 훈이에게 모글리의 흔적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L 교사에게 달려갔더니 이미 일주일 전부터 훈이 3남매(훈이 형제와 유치원에 입학한 여동생 영이)의 ‘귀환’을 알았다고 했다. 일자리 때문에 당진과 전라도를 번갈아 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지역 특수 교사는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했고, 덕분에 이번에는 준비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훈이는 발음 교정 훈련이 필요한데 이전학교 선생님에게 먼저 증빙 자료를 받아 제출해서 다행히 지원이 결정됐어요. 듣기로는 영이가 셋 중 가장 어려움이 큰 것 같아요. 어쩌면 영이도 특수반에 더 많이 머무를 수 있겠어요.”

 학기 중 학교를 옮기니 갑자기 두세 명을 떠안아야 하는 특수교사의 고충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L은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차분히 ‘훈이네 맞이 계획’을 알렸고 두 담임과 유치원 교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3, 4학년 과학 전담을 맡은 나는 과학수업에서 훈이를 만났다. 재미난 실험에는 눈을 반짝이다가도 틈만 나면 친구들과 장난치다 주의를 받던 훈이는 여느 3학년과 다를 바 없었다. 과학실 옆이 도움반이라 L과의 수업을 가끔 목격할 수 있었는데 발음은 서툴지만 할 말 다하는 이 녀석과 입씨름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야생소년의 눈부신 성장이 새삼스러웠다. 지난 1년, 그의 특별함을 키운 주인공은 단연코 L과 하반기 훈이를 맡은 특수 교사였다.     


 훈이가 전라도에 머문 사이, L은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새로 온 특수교사에게 5월이면 다시 올 훈이 정보를 꼼꼼히 알려주고, 내게도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세 번째 전학, A 교사가 5학년 훈이와 신입생 영이를 만났다. 생글생글 앳된 미소의 A는 졸업 후 첫 발령을 받은 신규였고 두 명의 도움반 친구를 맡고 있었다. 다행히 교육청에서 근무 중인 L 덕분에 훈이네가 올 거라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알고 맞는 매라고 덜 아프기야 했을까 싶지만.      


 동생은 훈이보다 장애가 심하다고 했다. ‘영이는 단답형으로만 소통이 가능하고 행동이 많이 거칠어 적응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하반기 담당 교사의 분석과 함께 A는 남매와 대면했다. 심지어 두 친구 모두 위생 상태가 형편없었다. 전쟁 직후 못 먹고 못 씻기던 시절도 아닌데 ‘이’가 웬 말인가. 머리를 긁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담임교사는 도움반에 보냈고, A는 이들을 위해 참빗을 마련했다. 신문지를 깔고, 참빗으로 머리를 훑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깨끗이 씻기고, 여벌옷으로 갈아입혔다. 

 이가 발견되면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해 집을 소독하고, 옷과 침구를 세탁했다. 보호자에게 위생을 당부했지만 복지사도, A도 어머니에게 기대치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도리어 어머니가 A에게 아이들 목욕 좀 시켜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니 누가 부모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석 달도 안 돼 씻기고 입히는 게 일상인 교사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 나이 먹은 나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기에 조만간 그녀를 도움반에서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다.     


 웬걸, 햇살 같은 A의 미소는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옆 반을 오가는 영이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웃음이 늘었다는 것이다. 날을 잔뜩 세운 채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영이는 선생님이 마련한 머리핀을 야무지게 골라 양 옆에 꽂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으로 변신했다. ‘어, 아’만 사용하던 어휘력은 여름방학을 지나자 문장형으로 발전하여 주로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 써먹는단다. 


 차 없는 뚜벅이 신세임에도 좋은 프로그램 있으면 훈이 남매를 비롯, 도움반 친구들을 데리고 어제는 교육청으로, 오늘은 체육관으로 쉬지 않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A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 25살 아니지?”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요?”

  “신규에 25살이 이럴 수는 없어. 이미 교사해봤지? 전생이 기억나지?”

 “선생님도 참,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절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두조차 못 내는 나는 뭐란 말인가.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훈이는 장애학생 체전에서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깡충깡충 뛰며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승전고를 전하던 A, 메달을 입에 물고 V표시와 함께 사진을 찍은 훈이보다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진심으로 훈이의 수상을 기뻐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의심한다. L 교사도, A 교사도. 그들은 과연 신규였을까. 아니, 잠시 날개를 떼어놓고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살다 보면 드물지만 날개가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바깥세상보다는 이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는 희망이 있는 공간이다. AI가 대체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요즘, 단언한다. 특수 교사, 그들은 절대 인위적 존재가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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