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먹이사슬
가슴 아픈 서열 1순위, 아버지
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이틴로맨스가 폭풍 유행하던 시절, 미남 백만장자가 ‘나를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라며 고백하는 상상은 해봤어도 그가 낭군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감생심이라 그랬나?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옅었지만 굳이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신념이었다. 아버지는 중학교 체육교사, 어머니는 참한 주부였다. 딸 셋인 우리 집은 쪼들렸지만 크게 모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가정이었다. 찬찬히 기억을 떠올려도 크게 서운하거나 쌓여있는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머리 굵은 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숙제하듯 내 몫을 할애하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일군 공간과 사람들이 진정한 내 영역이다, 상황과 관계에 얽매이는 삶은 싫다. 뭐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 여겼는데 꽤 오랫동안 사춘기에 머물렀나 싶다.
밥벌이를 하면서 가족을 향한 숙제는 돈이었다. 적은 생활비나마 놓치지 않고 드렸다. 명절과 생신 용돈은 당연히 별도. 급전 필요한 일이 생기면 현금서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니는 가정을 이뤘고, 동생은 어리니 내 몫이라 여겼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서 척척 숙제하는 사람이었다.
IMF 직전인가, 미리 경제 위기를 맞았다. 불황으로 부업인 가게를 닫았고, 아버지마저 내몰리듯 ‘강제 명예퇴직’했다. 가족 숙제에 상담이 추가됐다. 졸지에 ‘삼식이’가 된 아버지는 모든 계좌를 일방적으로 바꿔 경제권을 독차지했다.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뒷바라지했던 엄마의 상실감과 배신감은 혼자 감당할 크기가 아니었다. 고함 소리가 방문을 넘어도 싸운 적 없다며 홀로 삭히던 분이었다. 엄마의 푸념은 풀지 못해 켜켜이 쌓아 둔 영역으로 확산됐고, 횟수도 늘어갔다. 상담 소질 없던 나는 원인 제공자인 아버지, 숙제를 거들지 않는 언니와 동생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가족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
언니와 동생은 어땠을까. n분의 1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비난을 몰랐을 리 없다. 말은 날카롭고 행동 빠른 나는 버거운 둘째였을 터였다. 나누는 방법을 몰라 늘 결론만 통보하니 무력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너(언니)만 생각 있는 건 아니야.” 상처를 돌려 말했다. 그 조차 변명으로 여겼다. “생각이 있으면 말했어야지.” 마음을 더 후벼 팠다. 나야말로 참 무거운 동생이자 언니였다.
짧지 않은 세월,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숙제 기분이 깔린 최선은 상대에겐 부채감, 내게는 피해의식으로 자리한 적이 많았다.
종종 가족관계가 먹이사슬로 느껴졌다. 가족 공동체가 먹고 먹히는 생태계라니, 매정한 해석에 혀를 찰 수도 있겠다. 누구나 자신의 소망이 가장 중요한데, 관계 속에서 욕구 충돌은 종종 일어난다. 가족 사이 충돌은 타인보다 더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한다. 갈등을 피하고자 차라리 ‘먹히는’ 쪽을 택하는 존재가 생긴다. 우리 가족은 그게 나라는 생각을 꽤 오래 했다. 스스로 ‘자발적 무수리’라 칭하면서. 돌이켜보니 내가 틀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먹고 먹히는 관계, 즉 서로가 갑이자 을이었다.
아버지, 한 번도 ‘을’인 적 없는 최상위 포식자.
가족 모두의 공통의견이다(아버지 제외).
서울시 종로구 종로 3가 00번지, 서열 1순위의 본적이다. 귀하디귀하다는 서울 토박이.
“4대문 안에서 태어났다. 이런 사람 별로 없어. 그냥 서울 출신과 격이 달라.” 아버지는 본가를 회상할 때면 성골인 듯 눈빛에 힘이 가득 실렸다. 실제 ‘도련님’이라 불렸다는 부잣집 막내아들은 한국전쟁으로 부모님도, 집도 다 잃고 말았다. 타고난 운동신경 덕에 체육교사로 삶을 이어갔지만 도련님으로 살았던 15년은 아버지의 이후 삶, 정확히 말하면 가족관계를 지배했다.
자식을 굶긴 적은 없지만 헌신하는 분은 아니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애면글면하는 건 늘 엄마, 아버지는 태평 그 자체였다. 퇴직 후 경제권을 틀어쥔 아버지가 어색했던 건 열정적으로 움켜쥐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치열함은 믿고 걸렀다. 경쟁으로 얻은 열매는 마다하지 않지만 결코 경쟁의 주역이 되는 일은 없었다.
가족생일엔 엄마가 몇 번이고 찔러야 케이크 값을 건넸고, 여행이라도 가면 ‘참석만으로 자리를 빛내주는 분’인 아버지의 지갑은 도통 열리는 법이 없었다. 취직한 자식들에게 대놓고 손 벌리지는 않지만 챙겨드리는 용돈을 마다한 적도 없었다. 만원만 드려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와는 달리 맡긴 돈 찾아가는 양 주저함이 없었다.
이런 당당함에 부딪혀 상처 입기보다 먹히는 게 속 편했던 나는 ‘자발적 무수리’가 된 게 아닐까? 내 피해의식 지분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다.
뇌경색 발병 후 3년째 이어지는 병원 생활 중에도 요구사항은 끝이 없었다. 치료를 늘리겠다, 병원이 마음에 안 든다, 외박을 하고 싶다, 이 옷을 가져와라 저 옷을 가져와라 등등.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할 수 있는 만큼만 돌보겠노라 선언할 만큼 바라는 게 넘치던 분이다. 투병 중에도 아버지는 먹이사슬의 최상단을 고수했고, 늘 그 자리를 지킬 거라 믿었다.
그런 양반이 최근 전화조차 힘겨울 만큼 기력이 바닥이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단다. 자식들의 고충을 알아채고 서열 1순위를 내려놓아 아픈 것만 같아 가슴이 무너진다. 나는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이어도 좋으니 아버지가 다시 당당한 도련님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