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창고 청소를 하다가 작곡 노트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둔 탓인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던 노란 노트였다. 색이 바래있던 그 노트를 살짝 위아래로 털고 펼쳐보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가 만들었던 노래들이 그 안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아... 이게 아직 있었구나
반가우면서도 뭉클해지는 이상한 감정이 꿈틀꿈틀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나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조금 나은 음감을 갖고 있었고, 남들보다 티 스푼 만큼의 재능을 더 갖고 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음악 실기는 언제나 만점이었고 그 시절의 나는 어떤 악기든 쉽게 배웠다.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 모든 소리는 음으로 들렸고, 들리는 대로 손만 집으면 연주가 되니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교 음악 선생님 추천으로 작곡과 대학생에게 처음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클래식의 기초는 화성학이니 공부하면서 너의 가능성을 테스트해보라고 했다. 대학생에서 작곡과 출신의 선생님, 서울의 대형 학원을 오가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작곡은 피아노 연주, 청음, 화성학, 곡 쓰기 이렇게 4개를 전부 다 공부해야 했기에 끝이 없었고 비용도 나날이 늘어갔다.
내가 욕심을 부려 어린 나이에 서울에 있는 선생님께 배우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비용 걱정을 하면서도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셨다. 당시 17살인 내가 혼자 기차를 타고 서울 이대에 가서 레슨을 받았는데, 레슨이 끝나고 새벽에 기차역에 도착하면 엄마가 항상 데리러 오셨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기차를 탔는데 편도로 세 네 시간 정도 걸리는 탓에 그 긴 시간의 무료함을 버터구이 오징어로 버텼다.
2살 차이인 동생은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던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내가 부모님의 집중 케어를 받고 있어 의도치 않게 소외됐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내가 살던 지역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고입 진학 고사>라는 걸 봤고 동생은 그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커트 라인을 웃도는 성적이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시험은 동생의 15살 인생에서 본인의 인생을 결정짓는 첫 시험이었다. 그 시절을 이미 겪었던 나는 매일 힘들어서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평일에도 새벽까지 교과서를 보는데 주말에도 공부를 해야 하는 중3의 삶은 너무 버거웠다. 그런데 동생은 그 시절을 무난히 잘 지나갔다.
<천 개의 파랑>에 나오는 엄마 보경과 은혜 그리고 연재의 관계에서 묘하게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의 모습이 겹쳤다. 다리가 불편한 은혜를 신경 쓰느라 연재는 뒷전이고, 그런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엄마의 말에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던 연재. 그리고 그런 연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는 엄마 보경까지. 그 관계가 나와 동생과 엄마의 관계처럼 보였다.
동생은 연재처럼 토를 달지 않았다. 가끔 시험공부가 힘들다고 징징대기는 했지만 잠깐의 징징거림 후엔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도 큰 말썽 없이 지나갔다. 밤새 곡을 쓰느라 매일 지각을 했던 나와 대조적이었다. 동생은 레슨비가 많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엄마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크게 조른 적도 없었다. 나처럼 뭔가를 배우겠다고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도 않았다. 취미도 없었던 것 같다. 동생 이야기로는 관심 대상이 딱히 없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간호사로 취업을 하자마자 신용카드를 만들어 시원하게 긁고 다녔고 주말마다 항상 여행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차로.
비슷한 나이에 성장통을 같이 겪은 내가 동생을 챙기기엔 어렸고, 눈치를 챘더라도 아마 외면하지 않았을까? 현재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나름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무조건적인 서포트를 3년 동안이나 받았지만 내가 대학 입시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목표는 예술대학 하나였고, 그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알바를 하면서 음악 공부를 다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에겐 뒷바라지해야 할 어린 동생이 한 명 더 있었고 어린 동생의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또, 어느 예체능이든 부모님의 반대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무시무시하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돈을 못 번다, 재능이 없다는 말로 나를 옥죄었다. 슬프게도 부모님은 내가 작곡 대회에서 수상경력이 있다는 건 금세 잊은 모양이었다.
대학 입시 실패 후 나는 내게 있는 다른 재능을 살펴봐야 했고 음악 공부는 포기했다. 꿈까지 포기한 건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 넣어두고 다녔는데 입시 시절이 기억이 날 때마다 연습실을 결제해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그 마음을 채웠다. 대학 시절에는 음대 친구를 사귀어서 괜히 연습실을 쫓아다니고 다른 친구들이 레슨받는 걸 몰래 지켜봤다.
한 번 실패를 겪고 난 후 나는 내 꿈에 대해서 더는 엄마와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장시간 엄마의 넋두리를 들어야 하고, 나의 힘들었던 과거를 돌아봐야 하며, 한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생긴 나의 꿈도 공유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는 하되 깊은 대화는 끊겼다. 자취를 시작하면서는 많아야 일 년에 네 번 정도를 만났기에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의 속내는 더 알기 어려웠고 그렇게 1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제 말하지 않고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는 어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