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여행 1]
한동안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소설의 무대는 늘 미국 남부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주의 소도시였다. 그러다가 소설의 배경이 해외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 첫 무대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였다. 국제적인 음모에 휘말린 주인공이 신분을 위장한 채 볼로냐에서 숨어 지내면서 문제를 해결해 간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고풍스러운 유럽 도시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첩보 스릴러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당시 첫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있었는데, 시간을 내 꼭 한번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졌다.
마침 연구년이기도 해서 그 여행은 기간을 길게 잡았다. 여름철의 유럽 도시들은 가는 곳마다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고풍스러운 성당이나 궁전은 처음에는 가슴을 설레게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여행 일정 끝 무렵이 다 되어 볼로냐에 첫발을 디뎠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아직 거리는 훤했다. 인구가 1백만 명에 가까워 이탈리아에서는 여덟 번째쯤 되는 꽤 큰 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한적한 소도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지도를 들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숙소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나가는 소녀를 붙잡고 도움을 청했다. 소녀는 지도를 흘낏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앞서 가던 오빠를 부른다. 저녁 나들이에 나섰던 오누이의 아빠까지 동참해 갑자기 빠른 이탈리아어로 가족회의가 열렸다. 마침내 아저씨가 따라오라며 손짓을 한다. 골목 언저리에 숨어있는 숙소 앞에 이르러 일가족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변 산책에 나섰다. 숙소에서 지척인 마죠레 광장에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두고 오래된 흑백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어두운 객석에는 가족 단위나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많이 보였다. 이탈리아어로 더빙된 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야외 좌석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졌다. 오래전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보던 그 마을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다.
이튿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구도심 구경을 나섰다. 중세 시절 볼로냐를 에워싸고 있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있고, 한때 귀족들이 세 과시용으로 세웠던 ‘토레’라는 높은 돌탑이 여럿 낡은 주택 사이로 솟아 있었다. 토레 전망대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탑은 낡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해 곧 쓰러질 듯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정상에 이르자 저 아래로 온통 붉은 건물로 된 구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붉은 건물 색이 어우러진 강렬한 원색의 풍경은 마치 인상파 그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도시의 여름 공기는 더없이 맑고 청량했다. 볼로냐의 구도심은 고풍스럽긴 하나 관광지보다는 고즈넉한 소도시의 일상과 같은 풍경으로 더 인상에 남았다.
볼로냐에는 1088년에 설립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낡고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가 바로 볼로냐 대학이다. 볼로냐는 붉은 도시로 불리는데, 도심의 붉은 건물뿐 아니라 진보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도 그렇다. 대학 주변 거리에는 자유분방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은 철 지난 포스터에 낙서 투성이고 골목은 지저분한 것이 영낙없이 낯익은 대학가 풍경이었다. 젊은 학생들로 북적이는 캠퍼스이다 보니 유서 깊은 유적이라 해도 예외가 없는 모양이다.
정오가 다가오자 벌써 거리에 인적이 끊겼다. 3시 반까지 세 시간에 달하는 점심 겸 시에스타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가게와 관공서, 유적지는 문을 닫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굳게 닫힌 가게 쇼윈도만 기웃거리다가 작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주민들만 주로 보였는데 론리플래닛에서도 추천한 것을 보니 제법 유명한 맛집인 모양이다. 점심 메뉴는 소박한 볼로냐식 코스 요리였는데 와인과 커피까지 곁들이니 제법 그럴듯했다. 싸고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볼로냐 사람들의 여유가 더 부러웠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무수하게 많은 곳을 다녔지만, 볼로냐는 지금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곰곰이 짚어보니 낯선 방문자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친절한 가족, 마죠레 광장의 ‘시네마 천국’, 긴 시에스타 시간의 한적함, 일정에 쫓기지 않고 배회할 수 있었던 여유, 그런 것이 볼로냐의 전부였는데 말이다. 아마 정말 그리운 것은 잘 알면서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일상의 평화, 여유가 주는 잔잔한 즐거움이 아니었나 추측해볼 뿐이다.
<부대신문> 2021. 12. 1.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