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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Nov 25. 2022

마추픽추 가는 길

[주제가 있는 여행 3]


   코로나19로 여행길이 막힌 후에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며칠 전에는 마추픽추 편이 방영되었는데, 몇 해 전 가본 곳이라 반가웠다. 마추픽추는 유적 자체도 인상적이었지만 가는 길이 유난히 험난했던 기억이 났다.

   남미는 워낙 먼 곳이라 전문 여행자도 벼르고 별러야 겨우 갈 수 있는 험지로 알려져 있다. 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최대한 편한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부산에서 서울, 미국 휴스턴, 페루의 리마, 쿠스코로 이어지는 긴 비행이 시작되었다. 10시간이 넘는 태평양 횡단 비행 끝에 휴스턴 공항에 내리니 길게 늘어선 입국자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경유할 뿐인데도 꼬치꼬치 캐묻는 관리에게서 해방되고 나니 벌써 탈진 상태였다. 다음날 밤늦게 페루의 리마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최대한 좋은 시간으로 골랐는데도 도착하니 자정 무렵이었다. 리마에서는 다시 해발 3,399미터의 고산도시 쿠스코로 가는 국내선을 탔다.

리마의 해변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했다. 해변 공원에서 하늘을 나는 행글라이드를 보며 태평양 저편 부산을 생각했다. 


   쿠스코에 도착하자마자 고산병으로 시름시름 앓았다. 여기서 엄청난 바가지요금을 치른 후 외국인용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 기슭의 아구아스 칼리엔테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마추픽추에 올랐다. 이 고산지대는 늘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어 과연 유적지를 볼 수 있을지 불안했으나 그나마 운이 좋았다. 높은 비탈에 오르니 청명한 하늘 아래 잉카 고대도시가 그림엽서처럼 펼쳐졌다.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따라 계단식 밭이 층을 이루고 있고 높은 산허리를 따라 지그재그로 버스 길이 나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감동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그 멀고 험한 길을 비행기와 비행기,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이동한 것이다. 집을 떠난 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체류 시간을 빼고도 무려 4일 동안을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한국 여행자로서는 이게 가장 짧고 편하게 온 것이다. 젊은 배낭 여행자들은 리마에서 버스로 안데스 산맥을 굽이굽이 넘어 며칠에 걸쳐 쿠스코로 이동한다. 모험심이 더 강한 (그리고 시간이 많은) 여행자는 쿠스코에서 3박 4일 동안 잉카 트레일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 마추픽추에 오른다. 수백 년 전 잉카인들이 오가던 바로 그 길이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에서는 방문할 명소가 목적지이지만, 때로는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겪는 경험이 더 기억에 남기도 한다. 경유를 목적으로 들르긴 했지만 리마도 흥미로웠다. 옛 유럽 분위기가 물씬한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리마 대성당과 산토도밍고 성당 등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했다. 남미 도시로서는 드물게 리마는 맛있는 식당도 많았다. 마침 리마에 머물던 기간이 그해 마지막 날이라 머나먼 이국땅 호텔에서 신년맞이 불꽃놀이를 감회에 젖어 감상했다.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시 위에 스페인풍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해발 3740미터 고지대라 한동안 고산증으로 고생했다. 
마추픽추는 상상하던 모습 딱 그대로였다. 유명 여행지는 기대가 워낙 커 실망일 때가 많은데 이곳은 예외다.

   마추픽추가 아니라도 쿠스코도 둘러볼 만한 도시였다. 빈틈없이 정교하게 끼워 맞춘 잉카 석조물의 토대 위에 스페인식 성당이 들어선 광경은 이 도시가 역사의 흔적으로 층층이 쌓인 도시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숙소 주인이 권한대로 현지인 식당에서 페루인처럼 저녁을 먹었다. 돌이켜보면 마추픽추뿐 아니라 이 모든 사소한 경험들이 나의 첫 남미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얼마 전 한국 건설사가 마추픽추 신공항 건설 사업을 따냈다는 기사가 떴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에 들어설 새 공항은 넓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장거리 국제선이 취항해 여행자의 편의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한다. 기사를 보면서, 가파른 산 사이에 마치 항공모함 활주로처럼 위태위태하게 자리 잡고 있던 자그마한 쿠스코 공항이 생각났다. 아마 앞으로 뜨내기 여행자들은 리마에도 들르지 않고 심지어 쿠스코까지 생략하고 마추픽추에서 인증 사진 찍는 것으로 페루 여행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잉카 유적지 역시 방문객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이전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여러 해 전 그 먼 길을 거쳐 고생스럽게 마추픽추에 오르면서 불평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좀 더 빠르고 편리하게 유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더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마추픽추가 신비로운 것은 가는 길이 멀고 험하고 고생스러웠고, 고산지대의 유적지가 늘 구름에 덮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대신문>, 2021. 12. 28.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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