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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Nov 26. 2022

유럽 여행과 박물관

[주제가 있는 여행 4]

   혹시 외국, 특히 유럽여행 가서 유명 박물관을 안 들러보신 간 큰 분 계신가요? 거의 20년 전, 영국 런던은 저에게 첫 유럽 여행지였습니다. 그때 그 유명하다는 대영박물관과 (잠시 곁가지이자 덤으로 한 여행에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실컷 봤죠. 소감요? 딱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이고, 피곤해!' 요겁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시실에 약간씩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전시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동과 경이로움과 흥미는 약해지고 나중엔 거의 극기 훈련 수준의 고통(특히 다리와 허리)으로 다가옵니다. 이걸 하루에 본다는 게 애당초 엄청난 과욕이자 무식함, 만용을 모두 합산한 것임을 (알면서도) 몰랐던거죠. ‘이 많은 돈 들여 다시 언제 오겠나?’ 하는 본전 생각, 그래도 세계적인 명작이자 가이드북에 나오는 건데 모르면 무식한 놈이라 꼭 봐야지 하는 (초등생 이후 꿋꿋이 붙들고 온) 숙제의식이 발동한 겁니다. 그 과정을 꾹 참고 끝까지 버텨낸 후, 나중에 찻집에 편히 앉아서야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스스로 약간의 대견함과 뿌듯함, 본전은 했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아득한 피로감과 진한 커피향과 어울려 이번에는 진짜 유럽에 온 거 같은 푸근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황당한 감정에 대해 처음엔 무식의 발로로 여기며 약간의 자책감까지 느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나름대로 합리적인 반응이었더라구요.

   하루에 벼락치기로 관람이 아니라 (거의 말을 타고 스쳐가는) 주마간산식 구경을 마친 후에 보니, 영국과 프랑스의 두 박물관에서는 꼭 꼬집어내기는 어렵지만, 한물 간 제국의 오만함이 강하게 묻어나는 듯했습니다. 엄청난 전시물(물론 수장고의 더 많은 유물은 주로 변방 국가 순회전시용으로 쓰이죠)은 하루에 다 볼 수 없다는 절망감, 촌사람 기를 팍 죽여놓는 화려함, (책에 나올 정도의) 유명세로 뜨내기 관람객을 정서적으로 압도합니다. 책에서 읽은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 경험을 감동으로 승화시키긴 도저히 무리죠. 전세계 역사의 흔적을 한 자리에 결집해놓은 엄청난 제국의 힘을 절감하게 되죠. 지금은 점차 시들어가는 제국의 영광은 오히려 이런 오만함을 더 절실하고 절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오래전 헐리우드 고전영화 ‘선셋대로(Sunset Boulevard)'에서 본 늙어가는 여배우의 자부심처럼요.

   이후 여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박물관이 뭐 다 그렇지, 왠 잔소리냐’ 하는 식의 따가운 핀잔성 시선에 익숙해져 ‘닥치고 관람!’을 여행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을 즈음이었습니다. 동유럽 슬로베니아에 있는 조그만 전쟁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국경 시골 마을의 (그것도) 전쟁박물관이라니 애당초 기대는 접은 상태였죠. 지금은 작고하신 옛 은사 노부부의 안내를 받아 가까운 나들이 삼아 들른 것인데, 여기서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박물관이 소재한 슬로베니아의 그 계곡 마을은 슬라브계이면서도 오스트리아, 오스만, 이탈리아 등 온갖 강국들이 (물론 전쟁으로) 부닥치면서 수차례 주인이 바뀐 접경지였습니다. 이 조그만 박물관은 전쟁 영웅이나 유명한 장군들이 아니라 애꿎게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병사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구성한 박물관인 셈이죠. 딱히 기억할 만한 대표적 전시물은 없지만, 참 애잔하고 숙연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녹슨 총탄 더미 위에 놓인 병사들의 엽서를 보면서, 포탄이 쏟아지는 진흙탕 참호 속에서 병사들이 경험했을 고통과 공포를 상상했습니다. 그 지역 주민들의 역사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굴곡어린 삶을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네요.

 

슬로베이나와 이탈리아 국경 시골 마을에 있는 전쟁 박물관은 1993년 EU의 우수박물관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붉게 녹슨 총탄 더미 위에 병사들이 가족과 주고받은 엽서가 놓여 있다. 

   아, 한 군데 더. 우연히 그리스의 (요새 빚잔치로 유명한 그 그리스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 예술에 대해 짧은 지식 밖에 없는 내 눈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 큰 건물에 전시실이 거의 텅 비어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박물관은 지상 전시실부터 4층까지가 모두 전시실이었는데, 건물 공간에 비해 전시물은 별로 많지 않고 인상적인 걸작도 없다는 점이 감명 깊었어요. 건물에서 요지인 3층엔 휴게실밖에 없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이 박물관이 보여주고자 하고 잘 보여주는 것은 ‘텅 비어있음’이었습니다. 애당초 그리스의 전반적인 ‘경제적 여건’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며 최고급으로 박물관을 지어놓았기에, 빈약한 전시물은 더욱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전시의 백미는 바로 4층에 있습니다. 원래는 4층 전시실 전체에 걸쳐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엘긴 대리석Elgin Marbles)를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조잡한 석고 모형만 떠서 (임시로) 빈자리를 채워놓은 상태입니다. 


파르테논 유적 전시를 목적으로 지은 아테네 파르테논 박물관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 전면부의 기둥과 지붕 사이의 삼각형 공간을 박공(pediments)라 부르는데, 여기에 아테네와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조가 새겨져있었다. 


   물론 그리스는 오리지널 유적이 들어올 때까지 ‘임시로’ 설치한 전시임을 강조하면서 유물 반환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현 ‘점유자’인 대영박물관 측은 콧방귀나 뀌면서 요지부동입니다. 반환을 요구하는 국가에 하나둘씩 내주다가는 몇 년 안 가 대영박물관이 텅 비게 될 터이니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실제로 대영박물관은 처음 개관한 후 100년이 넘도록 영국 내에서 출토한 유물은 한 점도 없었다네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파르테논 유물은 그리스 뿐 아니라 서구, 나아가 인류의 공동문화유산 운운하면서 오리발을 내밀었고, 오히려 그리스의 보존 능력에 의문을 표하면서 자존심을 긁어댔습니다. 오기가 발동한 그리스는 보란 듯이 최신, 최고의 국력 과시용 박물관을 지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빈 전시실을 강조한 셈입니다. 그래서 이 박물관은 나처럼 잠시 스쳐가는 관광객이 보기에는 그리스의 과장된 자존심 뒤로 어쩐지 약소국의 굴곡 많은 역사와 서글픔, 애잔함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짧은 지식 탓에 비슷비슷해 보이는 그 많은 유럽 국가의 유적, 박물관을 여행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일일이 방문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 묘한 심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나름대로 (자랑스럽든, 치욕이나 슬픔이든)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박물관만은 이런 스토리텔링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두 박물관을 보고나니 그동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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