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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Nov 27. 2022

여행이란 무엇인가?

[주제가 있는 여행 5]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의외로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집니다.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잡동사니들, 등하교 길에 기웃거리던 만화가게의 표지들, 딱히 맛이 있었다고는 하기 어려운 ‘불량식품’이 지금 돌이켜보면 소중하고 애틋한 느낌을 줍니다. 지금 누리는 생활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하기만 하고, 그 당시에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불편하기만 하던 것이 현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로 낭만적 경험으로 통합니다. 여행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여행은 어찌 보면 편안하고 친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설혹 그게 훨씬 불편하고 낯설고, 때로는 좋지 못한 경험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말입니다. 어릴 적에 ‘바캉스’라는 이름으로 한여름에 해수욕장 나들이 참 많이 했지요? 돌이켜 보면 시원하고 편안한 집 놔두고 지겹도록 넘쳐나는 인간들 틈새에 부대끼며 무더위에 고생하고 바가지만 쓰고 와서는 한 며칠 동안 벌겋게 달아오른 등짝을 달래느라 고생하는 게 바캉스 아니었나요? 그래도 이듬해가 되면 나쁜 기억은 싹 사라지고 또 그날을 학수고대하게 됩니다. 

   여행은 그냥 딱히 볼 거나 구경할 게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든 가도 좋다는 느낌에서 시작하는 무모한 결정인 듯합니다. 철없는 일탈성 행동과 달리 여행에 대해서는 모두 낭만적이라고 봐주는 게 약간 다를 뿐이죠. 더구나 혼자 떠나는 여행은 대개 자신은 하지 못해도 남들이 하면 ‘쿨’하다고 봐줍니다. 무모함과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더 높여주거든요. 이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목록에 올려둔 여행을 어떤 이유에든 떠나지 못할 여건이라면 부러움과 약간의 심리적 박탈감은 더욱 커집니다. 

   여행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편안하고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집시처럼 기한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면 여행을 부러워할 사람이 몇 이나 될까요? 더구나 직장이나 가정에 얽매여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감질나는 한시성이 여행에 대한 갈망과 애틋함을 더해줍니다.

   여행, 특히 홀로 떠나는 여행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생소한 나라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소매치기를 당해 소지품을 모두 날리는 당혹스런 경험도 합니다. 가끔은 예약해둔 항공편이 취소되어 공항에서 노숙까지 해야하는 황당 시츄에이션도 여행 경험에서 필수품이지요. 어린 시절 바캉스의 악몽과 비슷하게 불유쾌한 경험이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면 모두 여행의 낭만이라며 아름답게 윤색됩니다. 

   물론 여행에도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관광, 특히 패키지 관광은 혼자 떠나는 여행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정된 체험 방식입니다. 행선지나 숙박, 교통편 등 모두 한치의 오차없이 계획대로 움직이고 정해진 곳에서 사진 찍고, 주는 대로 먹고 구경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여행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는 대개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금 중국에는 엄청난 관광 바람이 불고 있는데, 아직은 국내여행 조차도 상당 부분 이렇게 단체 패키지 관광으로 다닌다고 하네요. 하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동남아시아의 오지를 다녀보면 혼자나 둘이서 배낭 하나 메고 몇 달씩 쉬엄쉬엄 다니는 서양인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집단은 여행이라는 체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주 다른거죠. 대다수 중국인들이 아직 관광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면, 서양인들은 진짜 여행이라는 체험을 중시합니다. 이 파란 눈의 배낭여행족들은 눈으로 스쳐가는 관광이 아니라 오래 머물면서 현지의 삶을 느끼는 체험의 '진정성'이야말로 여행에서 진수라고 보는 셈이죠. 

베네치아 중앙역에서 난데없이 즉흥 무대가 마련됐다. 누군가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너도나도 춤판에 뛰어들었다. 

   짧은 개인 경험으로 보더라도 관광에서는 이런 체험을 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100배 즐기기’ 류의 가이드북은 쿨해 보이면서도 불안하기만 한 홀로 여행에 패키지식 여행처럼 정해진 대로 따라하는 안정된 여행방식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한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정해준 교과서적 코스를 거치고 나면 뭔가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짜 여행을 경험한 게 아니라 유리창 너머로 아이쇼핑만 한 것처럼 감질나고 겉도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패키지 관광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이 들끓는 유명여행지도 비슷한 소외감을 절감하게 됩니다. 거대한 뷔페식당에 가서 종목별로 한 젓가락씩 모두 맛보았다고 해서 모든 음식을 섭렵했다고 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반면에 비행기나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여행 일정이 일그러져 엉뚱한 소도시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 의외로 오래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잘 알려진 선진국 관광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저개발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때가 덜 묻고 엉성한 부분이 많아 진짜 여행에 가까운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게 좋은 여행이며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냥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떠나면 됩니다. 어차피 경험과 느낌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이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뽕짝을 즐기는 사람에게 오페라를 권유하는 일은 지식인의 위선일뿐 가당치 않습니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다닐 만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행이라는 모험을 시작하려면 돈과 시간, 호기심, 열정, 체력 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이중 한두 가지는 꼭 부족하지요. 감질나게.. 20대에는 다른 것은 넘치도록 많은데 돈이 없고, 30대는 시간만 없고,.... 그러다 50-60대로 넘어가면 열정이나 호기심이 고갈된다고 하네요. 물론 그나마 체력을 잘 관리해두었다는 조건하에서요. 여행은 가출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가출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감행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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