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것 또한 훌륭한 소통기술이다
주말 휴식이 기대되는 즐거운 금요일 아침,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고객의 이름을 주제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성 고객 한 분이 재혼 후 성이 '김'에서 '허'로 바뀌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추측하는 중이었다.
한 직원은 원래 허씨였는데 남편 성을 따라 김씨로 바꿨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다른 직원은 전 남편 빚 때문에 시달리다 이혼하여 인생을 리셋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육십이 다 되어가는 고객이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아예 독일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인데다가, 성까지 바꿨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으나, 덕분에 좀처럼 드물게 아침 시간이 시끌벅적 화기애애한 대화들로 채워졌다.
직원들의 대화를 따라 생각해보니 나도 고객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았다. 차마 직접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셨던 지O녀 할머니(영어로 Hell), 상담 내내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던 민망한 야한 표현의 여선생님 이름, 굉장히 잘생기고 중후한데 이름이 점식이었던 회사 대표님 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재미난 기억이 많다.
이름 에피소드 하면 우리 딸의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가 없다. 가끔 이름을 주제로 대화를 할 때면 딸의 에피소드를 얘기하곤 하는데 사람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비난하지만 진짜 사실이다. 내용은 이랬다.
딸아이를 막 출산한 다음 날,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꼭 오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평소와 달리 고집을 부릴 때, 나는 아버지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았고, 아버지의 다른 의도는 경험상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재차 물으니 아버지가 공부 중인 불교대학의 스승인 유명한 스님이 손수 딸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셔서, 이름을 쓴 족자를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손수 손녀딸 이름에 기여할 수 있는 것 때문인지 들떠 있었고, 나와 아내도 내심 기대했다.
부리나케 병원에 오신 아버지는 간단히 안부를 묻고는 본론으로 들어가 족자를 펼치셨다.수려한 붓글씨로 된 이름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딸 아이가 비상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신이 나서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묻자 아버지는
"이 스님은 정말 공부가 깊으신 분이고, 이름을 잘 지어주시지는 않는데 정말 어렵게 부탁한 거야." 딴소리로 답하셨다.
"아버지, 너무 감사하네요. 안 그래도 이름이 큰 고민이었는데 진짜진짜 잘됐어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궁금해 재차 물었더니,
"이 글씨체는 아무나 쓸 수 있는게 아니야, 이 스님의 수양 정도 돼야 나올 수 있는 거니까, 잘 간직해야 해." 하며 또 즉답을 피했다.
"그럼요, 잘 간직할게요. 근데 아버지, 애 이름을 어떻게 읽는 건데요?"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재촉하듯 물었더니,
"맑음을 세상에 크게 미치게 한다는 뜻으로, 다할 '치'에 멀 '원'자야." 다소 머뭇거리며 답하셨다.
"치원? 어, 이름이 예쁜데요." 기뻐하며 말하자, 아버지의 표정에 약간의 여유가 돌아왔다.
"치원이, 치원이. 괜찮은데요 아버지. 유치..."
처음에 이름만 불렀을 때는 잠깐 괜찮다 생각했는데, 성까지 붙여 부르다 결국 좌절했다.
부모로서 내 딸을 '유치원' 이름으로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고, 아버지는 풀 죽어 돌아가셨다. 그 이유 때문인지 둘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름에 개입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정말 손녀딸이 유치원으로 살아가길 바라셨는지가 문득 또 궁금해진다.
나는 이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어머니가 이름 없이 'OO 엄마', '양평 이모'라고 불리는 것을 여간 못마땅했던지라 나는 지금도 아내를 이름으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인칭 대명사나 호칭 대신 꼭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것을 선호하고, 다른 사람을 소환해야 할 필요가 있는 대화를 할때면, 가급적 소환되는 이의 실명을 언급한다. 그 버릇이 조금 독특했는지,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또 실명 토크' 한다며 놀려대지만, 그게 싫지는 않다.
이름을 지어본 이들이라면 이름 때문에 고심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이름은 그들의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군가 애써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이름을 굳이 아끼고, '야, 너, 당신' 혹은 '새끼야'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사람 관계 사이의 많은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고, 나는 이 또한 중요한 소통의 기술로 여긴다.
오늘은 아끼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되도록 많이 불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