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문장 #1225

친절은 인격의 여유이자 본능의 역행이고 고귀한 인간 덕목이다

by 미스터Bit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대상포진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한 정밀검사에서 아내는 대상포진이 아닌 척수염 진단을 받았고, 결국 상급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어제 검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내가 있는 게 오히려 귀찮다며 한사코 병원에 올 필요 없다고 하여, 아침에 평소와 같이 출근하려고 눈을 떴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을 들러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들어 예정에 없던 휴가를 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른 아침에 아내가 전화해 담당 의사가 보호자 면담을 요청한다고 했다.


순간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리로 먼저 달려 나와 최악의 시나리오로 소설을 써 내려갔으나, 호흡을 가다듬고 사실에 기반해 차분히 대응하니 정상적으로 사고가 가능해졌다. 엄마의 기억은 나의 무의식에 여전히 깊은 공포로 각인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


대상포진 전문 병원이기는 하나 뇌척수는 코 파듯이 쉽게 뽑을 수 있으니 좀 더 입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며 너스레 떠는 의사 선생님의 유쾌한 농담 덕분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 병원에서 연결해 준 상급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다. 아침에 맞은 고함량 스테로이드 덕분에 아내의 통증도 일시적으로 멈춰, 가벼운 대화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했다.


예상대로 상급 병원은 분주했고, 많은 직원들이 근육 강화제를 단체로 얼굴에 맞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들이 굳어 있었다. 처음 온 환자는 이리 오라는 안내 문구가 있는 데스크에 가 진료 접수를 어떻게 하는지 물으니 증상을 되물어 척수염이라 답했고, 다시 어떻게 오셨냐고 묻길래, 아내가 아파서 왔다고 했더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답답했는지 내가 들고 있는 서류를 달라고 하여 보더니 진료 협력 건은 접수처가 따로 있다며, 이런 것 때문에 질문을 한 것이라 했다. 나는 사실 질문과 결론이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척수염이라 신경과 진료를 예상하고 갔는데 진료 협력 담당자가 정형외과로 접수를 해주어 다소 이상했지만, 이 병원은 동시 진료를 하나보다 생각했다. 정형외과는 역시 사람이 많았고 접수 간호사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을 거라고 굳은 얼굴로 말하기에 나는 또 그 조금이 얼마인지 물어야 했고, 간호사는 1시간 반쯤 예상한다고 했다. 이곳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곳 병원만의 언어를 쓰는 것 같이 느껴졌고, 나는 적응이 어려웠다.


겨우 두 시간 만에 호명되어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은 영어로 된 질병명을 직원이 착각하여 신경과가 아닌 정형외과로 접수했다고 연신 미안해했다. 그에 반해 남은 처리를 인계받은 간호사는 이제 점심시간이라 1시 반에 신경과에 가서 오후 진료를 접수하라고 안내하기에, 내가 그때 시작하면 얼마나 대기하는지 물으니, 그녀는 많이 기다릴 수 있을 거라 건조하게 답했다. 나는 두 시간을 기다렸고 이제 12시라고 다소 원망 섞인 톤으로 말했다.


바쁜 업무와 많은 환자들, 그녀의 기계적인 안내는 충분히 이해되나, 그녀는 사족으로 원래 이 진료는 정형외과 진료를 보고 신경과를 가는 것이 순서라고 말을 보탰다. 급기야 당일 접수는 원래 진료받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배려로 오후 진료가 가능하다는 듯 말했다. 실수가 있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경 쓰겠다는 약간의 친절이면 충분했는데, 그녀는 동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선택했고, 나는 더는 참지 않았다.


나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고 실수만으로 비난받는 것은 경우에 따라 부당할 수 있으며, 그보다 그 실수를 정정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이곳 병원의 룰을 잘 몰라 그렇지 이 정도 장시간 기다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지적하듯 설명했고, 나는 이번에는 동의할 수 없어 오류를 정정해 달라고 주위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주목될 정도의 큰소리로 요구했다. 더구나 아내의 스테로이드 지속 시간은 점점 줄고 있었고, 끔찍한 통증을 병원 로비에서 맞이할 가능성은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나의 목청 높은 요청 덕분에 아내는 마침내 4시에 입원실에 누울 수 있었다. 입원에 필요한 의사결정은 담당 의사 선생님과의 진료 시간 5분이면 충분했음에도, 아내는 병원에 도착한 지 6시간 만에 드디어 마음을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친절은 기본값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친절은 인격의 여유이자 본능의 역행이고, 많은 이들이 실천하기 어렵기에 고귀한 인간의 덕목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누구도 친절하지 않다고 비난할 권리는 없다.


다만 친절하지 못해 안달 나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많다면 우리 사회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사회 온기가 올라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합심하여 타인을 위한 작은 친절로 사회 온기를 1도만 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크리스마스이브에 큰 의미를 두는 성향은 아니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와 크리스마스이브에 12시간을 꼬박 같이 있었다. 비록 병원이기는 했지만 이 또한 운 좋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오늘의 한문장 #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