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명절 마지막 날, 가족이 조조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가끔은 부쩍 크는 아이들이 아쉬워 시간을 움켜쥐고 더는 흘러가지 않게 붙들어 매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럴 때는 또 아이들이 커서 좋다 생각든다. 개인적으로 영화라는 창작물을 어떤 장르의 문화적 생산물보다 좋아하고, 아이들 없이 연애하던 시절 아내는 CGV 프레스 카드를 가지고 있어 영화관을 커피 마시듯 자주 가던 때가 있었기에, 요즘 가족들과 영화관에 갈 때면 그때 생각에 혼자 설레곤 한다.
조조영화임에도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회의적인 우리 장모님조차 주변 지인분들이 관람을 추천했다고 하며 영화평을 들었을 정도이니 특히 어른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대단한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포인트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분들이 관람을 권장했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이 글을 적으며 생각해보니 현재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이목이 집중되는 윤 전 대통령의 선고와 맞물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권력에서 물러난 그의 고립과 외로움이 영화에서 단종의 상황과 비슷한 면이 있어,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동정을 이끌어 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영화평을 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영화 그것 자체를 나 나름의 필터로 내면화해 나의 정서적 근육의 영양소로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기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해석과 설명에는 재주가 없다. 또한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흥미를 느끼는 관점의 포인트가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나 돼지를 발골하듯 예리한 언어로 영화라는 창작물을 먹음직스럽게 발골하는 평론가들을 보면 차원이 다른 부러움을 느낀다.
내가 본 '왕과 사는 남자'는 사실 개인적인 취향에서는 시나리오에서 주목할 만한 특별함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내가 눈이 희번덕해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는 동류의 영화에 있어서는 관상과 광해 정도가 생각난다. 아주 막연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창조해보고 싶다는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적 상상이 시나리오로 잘 완성되었고, 영화적으로도 스크린에서 구현해낸 구성이나 짜임새가 탄탄하고 기승전결의 선이 명확해, 극적 긴장감이 적절하여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해진 배우의 연기는 시나리오와 별개로 압도적으로 좋다. 제목을 '왕과 사는 남자'가 아니라 '인간 엄흥도'로 바꿔도 좋을 만큼 감동적으로 봤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보여준 유해진 배우의 인물 구사력은 최근에 보여준 배우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참고로 최근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를 언급하자면 '어쩔 수가 없다'의 이성민 배우와 '폭싹 속았수다'의 염혜란 배우가 있다.
다시 '왕과 사는 남자'로 돌아와 유해진 배우에 대한 연기 평가를 내가 좋아하는 야구에 비유하자면, 그는 오타니급 퍼포먼스를 영화에서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혼자 던지고 치고, 보여줄 건 다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 몰입도가 좋았다.
유해진 배우의 연기 외에 좋았던 포인트 몇 가지만 언급하면, 먼저 그가 영화에서 달리는 장면이 많았는데, 나는 그의 달리는 자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초보 러너이기는 하지만 달릴 때 밸런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가는 중이고, 그런 관점에서 그의 달리는 밸런스가 상당히 좋았다. 언뜻 그가 방송에서 러닝을 즐겨 한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덧대지며 그가 스크린 밖에서는 치열하게 달리며 스스로의 육체를 단련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의 무시무시한 연기 에너지의 원천이 그의 단단한 신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삶에서 만나는 가족, 친구, 지인 혹은 동료라고 불리는 파트너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영화를 통해 강렬하게 느꼈다. 단종 이홍위를 연기한 아이돌 출신 박지훈 배우는 다른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 사이에서 비중이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기에 대한 평이 좋았다. 한때 웹툰에 심취하던 시절 재밌게 봤던 '약한영웅'의 드라마 버전에서 주인공 역을 한 그이기에 이전에도 그의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번에 전과 다른 압도적인 성장의 모습이 없어 조금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해진을 파트너로 만남으로써 그의 연기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것도 그의 복이자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도 일상에서 어떤 파트너를 만나는가에 따라 소위 보완되어 돋보이거나 경우에 따라서 실력이 반감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극 중 한명회는 단종을 죽음으로까지 압박하는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나는 그의 전략적 사고에 더 끌렸다. 그는 정교한 정세 판단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신속한 실행력으로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전략가의 면모를 영화에서 잘 보여주었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 시대에서 600년이 지난 현대에서도, 패자에게 사약을 내리지 않을 뿐이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강자들의 싸움은, 못지않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겨 나가는 전쟁과도 같다. 그런 관점에서 그를 재조명한다면 그는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이 우리 집안과 선조들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의도한것은 아니나, 우리 선조 할아버지는 단종의 복귀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분이셨고,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주니 꽤 흥미 있어 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 콘텐츠가 지닌 질문과 소통의 힘인 것 같고 아이들과 이런 주제로 대화할 수 있어 감동이 배가되었다.
이 글을 접하는 분들 중 아이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 아이들과 언제 극장에서 영화를 마지막으로 봤는지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또는 집에서 OTT로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유로 영화관을 찾는 가족 단위의 관객이 점점 줄고 있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가족들과 좋은 영화 한 편쯤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여유는 잃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