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한계 짓는 만큼 꿈이 자란다
2월의 마지막 날이다. 아직 월급쟁이 신분이라 2월을 각별히 애정한다. 다른 달보다 이틀 삼일 덜 일하고도 같은 월급을 받기에 왠지 큰 이득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만약 반대로 월급을 주는 입장이었다면, 설 명절도 있고 영업일수도 적은 2월이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상황이라도 처한 입장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다른 것의 차이, 즉 관점의 차이는 여간해서 좁혀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더불어 든다. 2026년 상반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부동산과 주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이렇듯 상당할 텐데, 사회는 갈등이 깊어질 것 같다는 걱정으로 생각이 확장된다. 일단 복잡한 건 제쳐두고 월급쟁이에게 2월은 봄 소풍 같은 것이다.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봄 소풍 기억이 난다. 나에게 봄 소풍을 3가지 단어로 압축하면, 어머니의 김밥과 보물찾기 그리고 장기자랑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봄 소풍은 전교생이 30분 정도 걸어서 인근 동산으로 갔다. 줄 맞춰 도로 양쪽을 걷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워낙 놀 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인근 동산이라도 방문하는 소풍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이벤트였다. 소풍이면 새벽 일찍 주방에서 어머니가 김밥을 싸셨고, 나는 너무 설레 겨우 잠들다 어머니의 인기척에 잠을 깨어 곁에 가 썰어주신 김밥을 주워 먹었다. 아직도 그 김밥보다 맛있는 김밥은 먹어본 적이 없다.
소풍을 기다렸던 또 다른 이유는 보물찾기 시간이었다. 운 좋게 보물이라도 찾으면 지우개, 자, 연필 따위의 학용품과 교환할 수 있었고, 다음 운동회나 가을 소풍 등 학용품을 다시 기대할 수 있는 학교 이벤트까지 책상에 고이 모셔둘 수 그 시절 보물을 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에 여간 설레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풍의 백미는 장기자랑이었다. 나는 끼가 없지는 않았는데 부끄러움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기질이 나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아들 녀석은 굉장히 활발하고 부산스러우면서도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다.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인물도 괜찮고 흥이 많아 주목을 많이 끌 수 있을 것 같음에도 결정적일 때 꼭 꽁무니를 뺀다. 아무튼 나는 장기자랑 시간만 되면 전교생 앞에서 부끄럼 없이 끼를 발산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내가 그 앞에 서서 박수받는 상상을 항상 했다.
반 친구 중에 장기자랑만 되면 맨 먼저 이름이 불리던 합창반 친구 녀석이 있었다. 평소에는 말 더듬는 버릇이 있던 그는, 음악 시간만 되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재능은 아니었었는데 그는 가요를 곧잘 불렀다. 특히 그는 이덕진의 '내가 아는 한 가지'를, 노래를 뽐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구들 앞에서 불렀고,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할 만큼 나는 매번 내가 그 친구의 역할을 대신하는 상상을 했다. 결국 상상과는 다르게 나는 단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손들고 반장을 했을 정도였고, 선거운동을 통해 학생회장도 했다. 웅변대회에서 전교생 앞에서 핏대를 세울 정도로 담이 작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껏 소풍 하면 장기자랑을 떠올릴 정도로 그 순간을 설레했음에도 왜 단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지 못한 것일까?
나는 그 원인을 아버지한테서 찾는다. 우리 아버지는 유독 고정관념이 강하고 자신이 아는 지식과 세계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고집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로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넌 나중에 대학 가서 데모하는 근처도 가지 말아라"였다. 우리 사회의 데모가 절정이던 1987년도에 나는 8살이었고 그때 기억이 하나도 없음에도 아버지의 그 말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이 그 얘기를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아버지를 통해 듣는 세상이 나에게는 우주이자 전부였기에 나에게 아버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강조한 것 중 하나가 TV 속 가수들이 나올 때마다 품행이 단정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너는 나중에 커서 절대 저런 딴따라가 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였다. 그 영향으로 나는 남 앞에 서서 차마 노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 같다. 대신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남에게 할 자식 자랑거리인 반장과 웅변대회는 성실하게 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아버지는 참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앉는 자세도 지적을 했고, 밥 먹는 태도도 지적했고, 자는 것도 지적했고, 옷 입는 것도 지적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지적했고, TV를 보는 것도 지적했고, 심지어 슬리퍼 신고 나가는 것도 지적했다. 아버지는 무슨 마음이셨을까? 어머니는 매번 아버지의 끝없는 지적을 겪는 내가 오죽 답답하셨는지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며 아버지가 들으라는 듯 크게 나무라셨고, 그 말은 두고두고 상처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시고, 선량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의 삶에 훼손을 끼치지 않으며 나라의 법과 질서를 누구보다 착실히 지켜오신 점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나에게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아버지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샜다. 요즘은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나도 잔소리가 늘어감을 때때로 느낀다. 그럴 때마다 지독하게 지적이 많았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늘 경계하며 아이들의 꿈을 응원하자 다짐한다. 내가 아버지의 교육을 감당하며 가슴에 품은 큰 저항은 꿈의 크기에는 황새와 뱁새의 꿈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계 짓는 만큼 꿈이 자란다는 것이다.
어쩌면 뱁새가 될 뻔했던 나는 부단히 꿈의 그릇을 키우며 다행히 황새 쪽에 가깝게 성장했고, 진지하게 여전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크기의 꿈을 가지고 있다. 우리 어른들도, 아무리 나이가 먹고 현실이 꿈보다 가깝더라도 최소한 꿈을 품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