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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면 어때

나는 공황장애를 내 인생의 최대 축복이라 생각한다.

by 경자언니

숨이 안쉬어 지는 날들이 많았다. 길을 가다 주저앉고 싶은 날도 많았고 가슴통증으로 불치의 병이 걸린건 아닌가 걱정했던 순간도 많았다. 언젠가 심전도검사에서 부정맥이 있다는 검사 결과를 들었던 것도 떠오르고

아직 엄마 손이 많이 가는 어린 두 아이들도 걱정이 되어 자꾸만 나쁜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힘든 시간들을 보낸 나날들이었다.

그 맘때의 나는 지하철, 회사 구내 식당 ... 몰려드는 인파속에 있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귀가 아프고 숨쉬는게 힘들었다.

살아야겠다 싶어 병원 투어를 시작했다. 숨이 안쉬어지고 가슴이 아파 응급실을 간것도 두번이고 그때마다 심장검사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마침내 신촌세브란스 심장내과에서 검사를 받고 심장쪽으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유난스럽다, 꾀병이다는 남편의 장난섞인 핀잔을 끝으로 병원투어는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내 아픔의 원인을 모른채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었다.


그날도 심장이 너무 아파 응급실을 거쳐 심장내과 진료를 보고 있었는데..그때 그 심장내과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심장내과 문제는 아닌거 같다고 신경정신과 진료를 예약해보는게 좋겠다고

살아야겠기에 급하게 신경정신과 진료를 예약했고 몇가지 검사를 통해 공황장애와 우울증 초기라는 병명을 진단받게 되었다.


한시간의 상담동안 내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께서는 내게

경자씨 몸이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소리치고 있는거에요. 번아웃이 온거라구요.

이대로 두면 10년뒤 경자씨의 자식들도 소아정신과 진료를 받게 될수도 있어요

엄마가 행복해야 자식들이 행복한거에요. 이제 그만 자신을 돌봐야 할꺼같아요. 이제 모든걸 그만두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혹시 배우자와 함께 왔는지 묻고 남편을 진료실로 부르고 나는 밖에서 대기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수 없으나 진료실 밖으로 나오는 남편은 꽤나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가가 촉촉해져있었다

그렇게 힘든줄 몰랐다고 . 힘들다고 했을때 엄살이라고 유난스럽다고 했던거 미안하다고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지 이야기 해달라며 잘 극복해보자며 ...10년만에 처음으로 내 아픔에 대해 공감해 주었다.

내가 밝은 아이라서 그게 너무 좋아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했던 오빠였기에

결혼 후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보는 오빠는 죄책감에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 당시에 나는 오빠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제일 컸다.

힘든 내 마음을 다독여주지 않은 오빠에 대한 야속함도,,,힘들다고 말하는데...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너만 이렇게 유난스럽냐고 했던 무심코 했을지 모를 오빠의 말들에 마음에 생채기가 났고

그렇게 내 마음의 상처는 크고 깊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내 고통의 원인이 죽을 병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공황장애라는 당혹스런 진단에 만감이 교차하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 2019년 가을이었다.


엄마의 긴 항암치료가 끝나고... 이제는 정기적인 검사와 경구용항암치료로 조금의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을 무렵이었고... 서로를 맞춰가느라 서로를 알아가느라 싸움이 잦았던 신혼도 아니였고....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어보였던...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와중에...찾아온 공황장애와 우울증초기라는 진단은 내 인생의 커다란 변환점이 되었다...


두번의 수술, 항암 주사 때문에 정기적인 입원이 필요했던 엄마의 긴 투병생활동안 오로지 보호자로 엄마 곁을 지켰던 나였기에 약해질수도, 마음껏 울수도,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수도 없었던 그 몇년의 시간이 끝나고 나니...우리가 극도의 긴장속에서 벗어나면 온몸이 아프듯이 . 내 몸과 마음이 그런 상태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행여 엄마가 잘못되실까 두려워 살아만 계시게 해달라고 마음 졸였던 긴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간사한 사람 마음에 자꾸만 서운함이 자리잡았다. 오로지 내 몫으로 두었던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던건 분명 나인데 언니와 동생, 아빠에 대한 서운함도 커졌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자꾸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가 나를 생각하지 않으니 이상한 서운함이 자꾸 내 마음에 커져갔었다.

엄마의 치료가 장기화 되고 그 속에서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는 신랑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괜히 눈치가 보여 그 또한 편치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의 딸, 남편의 아내, 두아이의 엄마, 꽤많은 제사를 지내는 종갓집의 외며느리,,, 해야할게 너무 많은데..내 능력치 밖의 일을 잘하려고 하다 보니..어느 하나 완벽히 해내지 못하고...나는 그렇게 탈이 나고 말았다.


일주일에 한번, 선생님과의 상담과 함께 치료를 시작했고 나는 그때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귀울려 들어준다는 것 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짬을 내서라도 내 시간을 확보해야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조언대로

미라클모닝을 시작했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꾸역꾸역 살아내는 하루가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가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공황장애를 사랑하게 되었다.

공황장애가 아니였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힘에 부친 하루를 살아냈을테고,

모두에게 잘하려 하다 보니 정작 나를 돌보지 않았을테고

모든 에너지를 외부에 쏱다보니 늘 번아웃상태였을테니...

나늘 지키는 법,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준 고마운 존재...


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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