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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정에도 능력치라는게 있다는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by 경자언니

이제는 신경정신과 진료를 보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졌지만 .. 내가 처음 신경정신과 방문했을때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예약을 할때도, 신경정신과만 있는6층 엘레베이터안에서 그 층의 버튼을 누를때도, 간호사 선생님께 초진이라며 예약증을 건낼때도...괜히 혼자 위축되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로 예약을 하고 직접온것 자체가 치료의 절반은 한 일이라며 의사선생님은 나를 칭찬해 주셨고 그렇게 나는 신경정신과 단골 고객님이 되었다.


감기가 걸리면 병원에 가듯이 마음의 병이 생겼으니 약을 먹고 치료를 하는게 맞는.거라며 잘 오셨다고 했지만 어쩐지 인생의 실패자가 된거 같은 기분과 내가 어쩌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하는 자기 연민에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마음이 나약해서 마음의 병이 생긴거라고 의자가 부족해서 그런거라고,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게끔 하는 신랑의 조언도 야속하게 들려왔고

이러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회사 내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고

그때의 나는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아파 정말 몸까지 아픈 상황에 이르게 되니 내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기도 했다.

생떼같은 내 아이들에게 건강한 엄마로 곁에 있어줘야된다는 생각이 나를 일으켜세우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게 선생님의 업무의 하나이겠지만 그 당시 선생님은 나의 마음에 격하게 공감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눈물 콧물바람으로 내 속의 응어리를 풀고오는 그 한시간이 내게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한동안 내얘기를 듣기만 해주셨던 선생님의 첫 질문은... 경자씨 오늘은 우리 경자씨 어린 시절 이야기도 좀 해볼까요 였다.

지나친 책임감과 힘들다는 이야기를 잘 못하는 내면에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나도 잊고 있었던 꼬마 경자를 만날수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의 싸움의 끝에는 꼭 이혼이라는 단어가 붙어있었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면 눈을 꼭 감고 못 들은 척 했지만...이불 속에서 무서워 혼자 운적도 많았고

행여 엄마가 언니와 나를 두고 집을 나가실까 ,..어젯밤 엄마 아빠의 싸움끝에 엄마가 했던 모진 말들이 사실일까 겁이 나 쉬는 시간에 공중전화로 엄마가 집에 있나 확인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늘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가 우리가 미워서 정말 집을 나가실까 두려운 마음이 컸기에..나는 엄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내가 참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건 ..엄마때문이었다.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을 뻔히 알기에, 늘 고생하시는 엄마를 곁에서 보고 자랐기에 나는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두 딸들이 착하고 공부잘한다고 늘 자랑하고 다니셨고 그 시절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 우리라는 걸 어린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더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은 사춘기 나에겐 내키지 않은 일이었고 좋아하는 남학생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정도로 창피한 일이었지만 나는 괜찮은 척 했고 그렇게 내 유년시절은 엄마일을 잘 도와주는 효녀였다.

정말 괜찮았다면 좋았을텐데 나는 괜찮치 않은데 괜찮은척 내 감정의 능력치는 벗어나게 되니 그 불편한 마음이 기준이 되어 버렸나 보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주변 사람들이 좋으면 됐지 하는 그런 ..


아마 어린시절의 그런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내 결혼 생활내내 큰 영향을 준거 같다는 생각을 비로소 해본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정이 많은 신랑은 가족애가 유난한 사람이었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좋아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지만 신랑의 그런 가족애로 상처를 받는건 내몫이었다.

신혼 초 신랑의 가족에 나는 온전히 포함되지 못했고 시댁문제로 싸우는 날의 그 끝은 꼭

"우리 가족이 너를 힘들게 하면 내가 가족을 버릴수는 없으니 우리가 그만살아야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신랑은 내게는 그렇게 모진 말을 서슴치않게 했고 서운함과 서러움은 오랜시간 내 가슴 켠켠히 쌓여갔다. 신랑에 대한 그때의 서운한 마음은 아직도 나를 눈물짓게 한다.



어느 순간부터 신랑에게 내 힘듦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끝은 너무도 뻔하니까.. 위로를 받기는 커녕 공감을 받기는 커녕 결국 상처가 되어 내게 돌아오는걸 몇번의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또 괜찮은 척을 해야했다.

편치만은 않은 결혼 생활 내내 나는 신랑에게 위로와 공감을 갈구했지만 .. 신랑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른척을 하는건지 알수 없지만.. 몰라주었고 , 나는 또 괜찮은 척을 하며 근근히 버티다 이런 사달이 난거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양하다. 수다스럽고 다른 사람과 감정의 교류를 중시하는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유형이었다.

내가 이러이러해서 힘들었노라 하면

상대방은 아 그렇구나 힘들었겠다 공감해 주면

나는 또 내 감정을 이해 받았다는 안도감에

그때의 그 마음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그런 유형의 다소 단순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신랑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내가 해결할수 있는게 없는데 왜 굳이 말을 해서 본인도 힘들게 하냐고 했고 그래서 그 시절 나는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상담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괜찮은 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 힘들다고, 버겁다고, 도와달라고,그렇게 소리쳐야 했었다는걸 ..

주변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돌봐야 하는 건 내 마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힘들다는 말도 잘하고, 내가 내키지 않으면 싫다고 말할 줄 아는, 내 감정을 읽게 된 .,. ."진짜 어른"이 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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