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커크의 죽음이 남긴 것들

by 소방작가

오래전에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이야기의 얼개마저 희미해졌지만 또렷하게 남아있는 일화적 편린은 ‘빌솅 경정’이라는 인물입니다. 십수 년 전에 읽었을 소설 속 서사에서 그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소임을 수행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대화를 잘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뛰어난 언어적 능력과 화술로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일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생각은 말을 잘하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른 듯합니다.

“얼빠진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다들 미친 소리라고 외면하는 이야기라도 관대하게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학교 친구들이 찾아와 잠꼬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도 그런 것들을 귀 기울여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그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하긴 그래>라는 말만 되뇌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심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끌려고 복잡한 말과 칭찬의 말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는데, 빌솅은 <하긴 그래>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어린 빌솅은 실제로 말은 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의 학교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학생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개미 제1부, pp. 181-182)

빌솅이라는 인물이 “하긴 그래”라는 말로 적절하게 대꾸하는 것만으로 대화 상대에게 말을 잘한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를 가늠하기 전에, 대화하는 목적을 자세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은 타자에게 발화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내용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자족할 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과 타인이 원하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화한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같다고 해서 대화가 통한다고 할 수는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대화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필요를 조절하고 타협하며 원만하게 삶을 이루어 나가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하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표현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지닌 욕망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을 통해 이상에 접근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거나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대화를 통해 당면한 사안에 대한 해법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빌솅 경정은 어린 시절부터 상대방의 말이 자신의 내부에 침투할 수 있도록 기꺼이 허용하였습니다. 좋은 청자는 화자가 지닌 의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말을 계속 이어가는 과정에서 화자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민주적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통해 내부의 오류를 성토함으로써 민주적 사회는 자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빌솅은 상대방의 발화를 주의 깊게 경청하는 비언어적 태도를 통해 대화의 상대가 해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빌솅과 같은 대화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청을 위해서는 침묵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개인 매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손쉽게 밝힐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침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침묵은 고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임에도 타인에게 ‘좋아요’를 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는 고요함을 깨트려 생각이 숙성할 수 있는 공간을 비좁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롭지만 쓸모없는 정보가 광장을 뒤덮는 것이 당연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청자가 사라지고 화자만 남은 시대가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목적 없이 인정만을 갈구하는 메시지는 선정성을 띠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구경꾼들을 끌어모으며, 그것은 얼마 남지 않은 청자의 귀한 인내심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포르노에는 해독해야 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사회에서 생성되는 담론이 인정 욕구를 갈망하는 말초적인 자극으로 가득할 때, 거기에는 해석할 것이 없으므로 포르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르노에는 서사가 없습니다. 서사가 없는 정보에 인간은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없는 것은 뇌리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혈액 속 헤모글로빈은 산소보다 일산화탄소와 쉽게 결합합니다. 일산화탄소는 사람을 질식하게 하지만, 산소보다 200배 이상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에 노출되면 거부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극적인 정보가 저장할 가치마저 없으니 숏폼 플랫폼은 사회에서 담론을 대체하며 빠르게 유통되고 간단하게 폐기됩니다. 그 과정은 그 어떠한 유산도 남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한 거대한 퇴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휴대용 기기와 대면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포르노처럼 해독할 것이 없고 선정적이며 결합력이 높은 콘텐츠는 생산자들에게 큰 부와 명성을 가져다줍니다. 그들의 성공은 신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그들이 성공한 만큼 대중은 사회적 관심이 고갈되어 타인을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힐 기회를 잃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예전보다 자신이 가진 의견과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나타내는 징후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개인의 사고를 마스킹하고 있는 현실과 공영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이 시청률의 부진을 이겨내지 못한 끝에 폐지되고 있는 현상에서 드러납니다.

24년 11월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는 MBC <100분 토론> 진행자 자리를 떠나며 쓴 칼럼에서 토론에 출연하는 패널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제 더 이상 토론 프로그램 출연자는 “상대와 나의 대사가 서로 어울리는지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정준희 교수의 진단입니다. 이제 광장에는 공동체를 위한 중립적 교섭 테이블이 사라졌습니다. 최근 언론 지형을 살펴보면 “극좌”나 “극우”와 같은 단어가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은 서로가 서 있는 위치를 좁힐 만한 접점이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려는 욕망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토론이 사라진 영토에 평화가 깃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난 25년 9월 10일, 평소처럼 대학 캠퍼스에 직접 방문하여 대학생과 정치토론을 벌이던 미국의 보수 정치 활동가 ‘찰리 커크’가 괴한의 총격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토론 방식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해보이라는 도발로 대변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광장의 기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영상은 즉시 숏폼으로 제작되어 확산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사람이 억울하게 암살되었는데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빌미로 좌파와의 전면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정치적 선전을 확산하고 있는 현실이 몹시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대화의 물꼬는 말라붙어 그대로 전쟁터의 전선(戰線)이 되었습니다. 찰리 커크의 죽음은 광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사상이 광장에서 경합하며, 그것 중 합리성을 갖추고 있는 안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택되는 방식이 도전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류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폭력을 통한 갈등의 해결을 이성적으로 자제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야만적 본성이 자유롭게 활개 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찰리 커크를 암살한 타일러 로빈슨이라는 용의자는 가중 살해 혐의로 기소된 법정에서 “세상에 악이 너무 많고, 그 사람은 증오를 너무 퍼뜨렸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극단적으로 사악한 증오 범죄를 일으킨 사람은 그 자신이며, 그로 인하여 전 세계는 이미 잔혹한 심리적 내전 상태에 돌입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대인의 소통 방식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 공포스럽게 와닿는 요즘입니다. 공동체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나와 다른 생각을 허용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듣는 것만이 민주적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라는 생각만이 남습니다.


찰리 커크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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