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가물가물한 기억의 한 조각을 작의적으로 편집
내가 방송작가가 된 것은 2000년 5월 경이었다.
미국 시애틀에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그동안 꿈꿨던 방송작가가 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두드려보고 다녔더랬다.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마산 M*C에서 광고처럼 방송작가를 모집한다는 스폿을 봤던 것 같다.
아직 대학 4학년을 재학 중이었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합격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작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방송국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건
남쪽 끝 진해에 살고 있는 나한테는 꿈이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시험 당일은 그래도 꽤 정장 느낌이 나는 옷을 챙겨 입고 갔다. 직장을 구할 때 그렇게 입으니까..
큰 회의실 같은 곳에 빙 둘러진 책상에 앉은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시험(?)을 봤다.
아마 라디오 오프닝을 쓰라는 것이 과제였던 것 같은데,
사실 무슨 정신으로 썼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날씨 얘기? 출근길이 어쩌고..
그리고 옆에 있는 작은 회의실 같은 곳에서 인터뷰 같은 면접시험도 봤다.
정말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왜 방송작가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건, 준비된 답변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내가 하고 있던 생각과 아주 비슷한 말을 하며 공감을 해주는 DJ 신해철의 클로징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 하는 얘기로 들리지 않고 누군가가 써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방송글로는 0점이다. DJ의 말이 아니라 글로 들리게 썼으니..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데 항상 100점짜리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까..
이 0점짜리 방송원고가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 내가 쓴 말글을 듣고 공감하고 감동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얘기는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지역방송 시험을 봤으니까..
마산 M*C프로그램 얘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인연이 깊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구할매’.. 당시 지역에서 하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는 꽤 포맷이나 캐릭터가 잘 잡힌 코너였다.
96년 새내기로 입학하고 처음 최루탄 가스 마신 날,
그 매운맛에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김혜란 선배의 아구할매는
“애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리 연기를 뿜고 가스를 뿌리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사실, 정확한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대열에 서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았는데 최루탄 가스를 제대로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감동받아 눈물이 나는 말이었다. 마치 아구할매가 내 편 같은?!
그래서 혼자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해 줄 수 있는,
힘없는 사람들 편이 되어주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우습게도' 방송작가가 되려고 했다.
어이없지만... 그때는 그게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방송작가 공개모집에서 떨어지는 좋은 경험을 했다
사실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큰 기대를 하지 말자,
나는 학생이고 이게 합격하면 난 직장인이 되는 건데, 그건 부담스럽지 않나.. 하는
내 안의 긍정시너지를 끌어올렸다. 자포자기!
직장인... 사실 2000년도에 우리나라에 프리랜서란 개념, 계약직, 비정규직이란 개념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크게 차이점에 대해 인식을 못하고 있었다.
-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IMF가 제시한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 중 하나인 ‘비정규직’이 노동을 갈라치기하는 심각한 사회갈등을 일으킬 거라는 걸, 당시 이런 결정을 하신 위에 계신 분들은 알고 한 일이겠지?! 지네 일 아니니까.. 만약 모르고 한 거라면 이걸 어떻게 욕을 해줘야 할까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건 줄 알고... 방송작가는 원래 프리랜서라니까
그런데 1주일인가 2주일 뒤에 연락이 왔다. 방송국에서..
원래 합격을 했던 작가가 아침 출근길 라디오 생방을 2번이나 펑크를 낸 거다.
그렇게 나는 1주일에 125,000원짜리 바우처를 받는 프리랜서 라디오 방송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