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Taipei - 여행 에세이

by Pink Brown

타이베이는 비다.


겨울날 타이베이의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흩날리기도 하고, 주룩주룩 퍼붓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가도 이슬처럼 오는 듯 마는 듯 비는 그렇게 내린다.


비가 그친 하늘에 해가 나는 적은 별로 없다. 온 공간이 흐느적거리는 습기로 가득 찬 상태로 차가운 기운이 흐른다. 여기에 해가 나면 습기는 그대로 뜨겁게 데워진다. 뜨거운 증기보다는 차가운 습기가 낫다. 그래서 흐린 날이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일 년 내내 습기로 인해 금방 벗겨지는 바람에 아예 도색하지 않은 건물과 곳곳에 슨 검푸르스름한 이끼와 나지막한 건물들이 흐린 하늘과 어울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어떻게 보면 음산하고 어떻게 보면 차분하다. 영원히 마를 것 같지 않은 타월과 젖은 우산에 낙엽처럼 물들어버린 가죽 여권 케이스, 그 안에 따스하고 다정한 불빛과 예전 그 시절의 향수를 짙게 풍기는 타이베이는 부산스럽지 않게 음전하게 그렇게 그곳에 존재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어른 스타일의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두 아들들은 아이에서 어느새 아동과 청소년의 사잇길로 들어서고 있었고, 용기를 내어 성인 기준에서 소화 가능한 - 그렇다고 너무 빡빡하진 않은 - 여행 일정을 세워 보았다. 이런저런 소소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비는 우리와 함께했다. 바닷바람에 옆으로 몰아치는 비를 우비로 이겨내며 사구에 생긴 신비한 자연 석상을 바라보던 예류, 흐린 하늘이어서 아쉬웠지만 그나마 비가 잦아들어서 풍등을 날릴 수 있었던 스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숯불에 구운 샹창(대만식 소시지)을 먹던 스펀 폭포,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많은 사람들에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연결되는 홍등의 거리 지우펀까지. 같은 비지만 장소마다 달랐고, 우리의 기억도 장소마다 다르게 추억되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서울에서 비에 신발이 쫄딱 젖으면 말리면서 구시렁거렸을 것이 뻔한데, 이상하게 타이베이의 숙소에서 아이들 신발을 말리면서 아,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았다는 생각을 하는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이상하기도 하지. 서울에서는 습하고 꿉꿉한 날이 계속되면 우울해지고 기분이 안 좋아졌을 법도 한데, 타이베이에서는 왜 매 순간이 즐겁고 좋은 것만 골라서 보게 되었을까.


이상하기도 하지. 비 맞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면서도 타이베이의 비는 웬만해서는 우산도 안 쓰고 맞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여행이 가진 마력일까, 타지에서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여행은 평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의 나를 만나는 기회가 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보는 택시 기사님께 어설프기 그지없는 중국어를 수줍어하지도 않고 말하기도 하고, 궂은 일이 있어도 그 안에서 일부러 좋은 것을 발견해서 가족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언제 어디에서나 이렇게 활달하면 좋을 텐데 아마도 그러하다가는 번아웃에 지쳐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서 여행은 특별하다. 그래서 여행은 가끔이 좋다.


그렇게 내리던 비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야 그쳤다. 나 홀로 여행에서 비를 만나는 날은 거의 없었기에 가족 중에 누가 비를 몰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가 오면 어떠한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우리의 기억을 조작할 것이다. 비구름과 물안개에 꼭대기가 가려져 있던 타이베이 101 타워는 이번 여행을 상징하는 기억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숙소의 베란다에서 101 타워가 보였다는 기억이 더 크게 남을 것이다. 중정당 광장에서 아이들과 장난치며 스냅 사진처럼 찍혔던 한 장의 사진이 나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처럼.


요즘도 우리는 가끔 이야기한다. 다음에 타이베이에 가면 맛있는 것만 잔뜩 먹고 오는 미식 여행을 다녀오자고. 먹고 쉬고 놀고 쉬는 타이베이에서의 미식 여행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고민은 찜통같이 더운 날과 망고 빙수를 바꿀 것인지, 서늘한 날과 석가(Sugar apple)를 바꿀 것인지다. 글쎄, 언제 가더라도 우리는 즐겁지 아니할까. 비는 언제라도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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