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며낸 이야기로, 실제 인물과 상황이 아닙니다.
근육질 몸매와 날렵힌 턱선을 자랑하며 늘 정장을 하고 다니는 남교사 L에 대해 소미는 제법 호감을 느끼며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평생 회사에 근무하다가 처음으로 학교 근무를 시작한 분이신데, 근무 첫해부터 일곱 개 반의 강의를 몰아드리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싶어 소미는 자신이 덜어낼 수도 있던 강의를 한 개 더 맡았다. 다른 행정 서류도 거의 다 작성해 드렸다. 평가 문제 편집도 도맡아 했다. 조금 도와주실 법한 일도 전혀 동참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교통도 보수도 높지 않은 시골 학교에서 함께 근무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해드렸고, 소미는 마음 깊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왔다. 평가 답안 초검을 다 할 터이니 재검만 부탁드린다고 했다. 초검을 하는 날, 평소 퇴근길 밝고 시원한 미소를 띠며 건네던 인사도 없이 L은 그냥 퇴근하였지만 소미는 본인이 초검을 하기로 했으니 정말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 함께 답안지 재검을 하기로 한 날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몸살 기운이 심해 다음 날 들은 한 개 반에 대해서만 채점을 속히 마쳐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소미를 앞에 두고, L은 별안간 책상 정리를 시작하더니, 급기야 교무실 커피통 청소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어차피 다른 일을 하느라 아파도 바로 퇴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소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실은 직전에 다른 낌새가 더 있었는데, 본인이 거주하는 고급 빌라의 아래층에 사는 사촌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보이는 태도가 돌변했던 점이었다. 전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는, 사춘기인 사촌의 학원 숙제에 대해 아주 다양한 질문을 하더니 막상 다음날 식사 자리에서 사촌의 숙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질문하자, 퇴근 길에 다른 약속이 있어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숙제를 도와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며 ‘숙제야 본인이 알아서 하겠죠 뭐.’라는 답변을 하였는데, 이는 어제 함께 사는 사촌의 학습 지도에 대해 아주 열의를 가지고 질문하던 모습과는 매우 간극이 컸다. 그리고 곧바로 화제를 돌려 사촌이 친구들의 무리와 함께 있을 때 우연히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친구중 한 명이 성범죄 이력을 지닌 것 같던데 어울려 다니지 못하도록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는, 당시 상황에서는 맥락이 없지만 다른 맥락상 설계된 듯한 이야기를 하였다.
하여간 재검에 대한 논의를 한 후에도 몸이 아파하는 소미를 붙잡고 시급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질문을 한참 동안 쏟아냈고, 이 중에는 이미 논의가 끝난 사항에 대한 반복된 질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모든 논의를 일단락하게 된 시점에는 평가 담당 부서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하여 답안지를 제출하고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캐비닛에 기밀 서류를 보관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는 소미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는 L을 뒤로하고, 소미는 무거운 답안지를 가방에 쑤셔넣고 집으로 향했다. L은 소미와 퇴근 방향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이유를 들어 한사코 동행을 피하였는데, 오늘은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서 한 대 피우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L은 평가 문항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러 온 아이에게 소곤소곤 무어라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중 ‘앞에 뚱뚱한 선생님’이라는 말만은 소미의 귀에 명확히 들려왔다. 학생은 극중 등장인물이 가리키며 언급하는 소설 속 아이도 ‘간접’ 등장인물에 해당하므로 등장인물이 열두 명이 아닌 열세 명이라고 우겼다. 학생의 논리에 따르면 극중 등장인물이 들고 있는 단체사진 속 스무 명의 사람도 ‘간접’ 등장인물에 해당하므로 학생의 이의제기는 타당하지 않다는 소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학생은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하였다. 평소 다른 면에서 보이던 젠틀하고 다정한 모습과는 달리 L은 학생과 학생을 상대하는 소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동료에게 민원 응대를 완전히 넘겨버린 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에, 소미는 L의 논의에의 참여를 촉구하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했지만, L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무슨 말도 안 되는...’이라고 일축하였는데, 이것이 학생에 대한 일축인지 소미의 요청과 치근거림에 대한 일축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리 내가 자기 스타일이 아니어도 그렇지 사람이 아프다는데......
소미는 눈물을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