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비겁했던 순간, 가장 멋졌던 순간

by 선라이즈

상견례를 마쳤다. 남편의 우려와는 반대로 불편한 질문은 단 한차례도 없이 양가 부모님께서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특히 남편의 걱정이었던 시아버님께서 열 살 많으신 친정아버지의 기분을 살피시며 계속 말을 이어가기 위해 오히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앞에 놓인 회 한점 한 점이 최고급이었음에도 양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모두의 노력으로 좋게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아무 일 없이 서로 웃으면서 잘 만나고 헤어졌으니 이제 됐다 싶었다. 천천히 남은 식을 잘 준비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기다렸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상견례를 준비하며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던 우리는 큰일을 잘 치렀다는 생각에 만족감과 함께 긴장이 풀렸다. 다음날 여유를 가지고 멀리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평소보다 더 먼 길을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달렸다. 결혼을 준비하며 마음을 많이 다쳤을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참고 끝까지 견뎌준 남편에게 고마웠다. 남은 결혼식은 내가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같이 하는 미래가 지금처럼 소소하게 재미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참 꽤 멀리 왔을 때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지금껏 그래왔듯 남편이 없을 때 받아야 하나 망설였다. 하필 시골길 한복판이라 따로 전화를 받을 수도 없었고 그 사이 남편이 전화 온 것을 알아버렸다. 남편은 괜찮으니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내심 부모님의 좋은 반응을 기대했기에 전화를 받아 보고 싶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나영아. 나는 너 못 보내겠다. 그냥 차라리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면 안 되겠냐. 그쪽 아버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더라. 나는 그 집으로 너 못 보내겠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시내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지하철 역 내에서 헤어질 때였다. 한동안 대화 없이 지내던 우리 사이에 아버지가 밖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시도하셨다. 하지만 서로 진전 없는 대화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딸이 내 딸같이 느껴지지 않는 서러움이셨을까 아버지가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셨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공장소에서 아버지가 울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과 울고 계신 아버지를 남겨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전부가 가슴과 머리를 터지게 만들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부모님을 울게 만드는지 ‘다 때려치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수없이 반복했던 다짐을 다시 또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져야 해.’






마음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결심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심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결정이 났는데 남자친구를 만나면 ‘이번주는 평소처럼 보내고 다음 주에 다시 생각하자’며 상황을 덮고 회피하기를 반복했다. 남자친구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부모님 핑계만 대며 안심시켰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에게 가서도 안심시켜 드리기 바빴다.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시간과 기회를 그렇게 흘려보내면 안 되었다. 너무나 비겁한 모습이었다. 사이에서 나도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기고 당사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힘들지만 부모님께 ‘내가 이 사람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부딪히며 설득해야 했고, 남자친구에게는 내가 너와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며 믿음을 주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 이 힘든 과정을 남편이 오롯이 견뎌내야만 했고, 부모님은 내가 거짓말만 했다며 배신감과 상처를 받으셨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울음 섞인 음성에 다시 한번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결혼을 결심한 이상 더 이상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려야 했다. 내 말에는 처음으로 힘이 실려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빠. 저 자신 있어요. 제가 잘할 자신이 있어서 결정한 거예요. 아빠가 잘 키워주셔서 제가 능력을 갖췄잖아요. 저 열심히 살 거예요. 혹시 이번 결정이 잘 못 되어도 저 잘 헤쳐나갈 자신이 있어요. 그럴 능력이 있어요. 다 아빠가 만들어 주신 덕분이에요.”


내 말이 계속될수록 아버지가 진정되고 안심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수록 내 말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처음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보는 것이. 살면서 부모님을 설득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부모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의 걱정에 같이 흔들리고 보호만 받는 막내딸 역할에서 벗어나 자식 걱정뿐인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보호해드려야 하는 것이 내 위치임을 깨달았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제야 제대로 찾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조금 멋져 보이던 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칭찬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