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ever? -> Novice
서예반에 등록하고 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개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기다려지기도 하고, 걱정이 앞서기도 하면서 묘한 긴장감마저 주변을 감돌았다.
따르릉~!
서예 선생님으로부터의 전화다.
서예 강좌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준비물에 대한 안내도 이루어졌다. 한국서예유통으로 가서 구입하라고 하신다. 월요일에만 오픈하는 곳이다.
날짜를 헤아려 오픈하는 날에 맞게 찾아간다. 그곳은 바로 신선들이나 노닐 것만 같은 서예 초보자들의 무릉도원이자, 철사장까지 연마해야만 할 것 같은 초보 붓잡이들의 탄약고와도 같다. 다행히 앞으로 쭈욱 긴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할 다양한 친구들이 와~하고 반겨준다. 사뭇 그 위세에 눌려 뒤로 자빠질 뻔했다. 하여간, 처음 만난 친구들(붓, 먹물, 벼루, 화선지 등)과 일일이 수인사를 나누고, 어미 돼지와 소풍 가는 아기 돼지가 되지는 않도록 빠짐없이 챙기고서 모두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이제 전쟁터에 나가기 전 총알 장전까지 마쳤으니 강의만 들으러 가면 된다. 입술은 룰루랄라, 콧김은 들랑날랑, 눈망울은 초롱초롱, 얼굴은 싱글벙글! 하하하, 웃으면 복이 와요. 아, 요즘 애들은 모르겠구나. 개그 코드가 다르니.
두둥.
드디어~ 첫 시간!
저마다의 인사와 함께 자기를 어필하는 간단한 소갯말로 시작한다. 나는 가스통을 신속 배달하는 사람이라고 알려 본다. 여기서 이제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동문수학하며 한 대가 선생님으로부터 붓글씨를 배우고 쓰고자 한다.
물론 초보인 나는 가장 기초인 가로획부터 배운다. 냅다 붓에 먹을 듬뿍 묻혀 꾸욱 눌러본다. 억울하게 필압에 잔뜩 눌린 화선지는 흥에 겨운 건지 멍이 드는 건지 화선지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킨다. 파장을 일으킨 지도 한참인데, 여전히 지루하리만큼 따분하게 선을 긋고 또 긋는다. 맨살에 타투를 하는 것인지 칼질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 혼곤히 빠져들고 만다.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스승님의 강의 소리가 꿈 속인 것 마냥 아련하게 귓바퀴에까지 살풋 전해온다.
삼절!
중봉!
회봉!
뒤통수를 가격하듯 난데없는 죽비소리에 깜짝 놀라 선잠에서 깨어난다. 난생처음 듣는 희한한 말들의 천국이다. 중봉, 회봉은 제쳐두고 삼봉 정도전은 들어봤는데 말이다.
우선, 입맛대로 가로 획만 세 장씩이나 끈기 있게 지치지도 않고 써 내려가고,
그럼, 다음엔 세로 획 쓰는 순서잖아. 완전 죽었다. 게다가, 누가 수도꼭지를 틀어놨나? 덤으로다가 숙제까지 콸콸콸. 연달아서 쭈욱 나온다. 무려 3장 이상씩 써 오라고 하신다. 초등학생이 따로 없구나! 숙제에 과제에 끌려다니다니. 벌써부터 지친 기색을 내면 안 되는데.
도대체 왜(whyever)?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나름 붓글씨를 써 본 경험도 있는데,
그것도 4군자 명인에게서 배운 화려한 전과(?)도 소유하고 있는데. 내심 속으로 불만은 있지만서도, 처음부터 새로이 배운다는 초보자(novice) 답게 나비스럽게 순박한 심정으로 안일하기만 한 정신에 단단히 무장을 해 본다.
본문 다음에 첨부해 놓은 비디오 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가로 획 하나(그리는 게 아니라) 쓰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엄청나게 힘이 든다는 사실.
초보로서는 입과 귀가 동시에 벌어지고,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내 속마음은 그야말로 일모도원! 멀기만 하구나.
그럼에도 '다음 시간에는 더 잘해보자꾸나'라고 속으로만 크게 외쳐 본다. 다음 시간까지 일주일씩이나 기다리면서 일단 묵향에 푸~욱 파묻혀보기로 한다.
킁, 킁!
당분간은 은은한 먹의 잔향에 감싸일 것 같다.
이 글을 애정으로 보시는 독자 여러분의 코에도 진한 묵향이 잠깐이나마 스치길 바란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무~욱 향이 느껴진 거야!
<서예 기본>
획을 그을 때는 붓이 거꾸로 들어가고(역입), 붓 끝을 가운데로 모아서(중봉), 한두 번 멈추는 듯하며(삼절), 다시 거꾸로 돌아 나오는(회봉) 방식이 기본이다. 그래야만 글씨에 힘이 실리고, 획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공무원연금 2025년 2월호 발췌)
말은 쉬우나,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기본이 기본인 것은 가장 어렵기 때문이고, 모든 것의 처음이자 또한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절감한다. 처음 붓을 들었을 때, 시건방 떨지 않고 정성스럽게 잘 배웠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이할꼬. 다 지난 일이다. 다시 지금부터다. 달려보자. 하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