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나혜석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름이다.
미술사적인 의미든
신 여성으로 한 활동이든
나혜석을 대체할 수 있는 이름은 없다.
청혼한 김우영에게 세가지 조건을 건다
첫째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
둘째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처가 낳은 딸과 떨어져 두 사람만 따로 살 것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결혼 조건이었다.
결혼 후 김우영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본격화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한 최린을 만났다.
두사람은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고를 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고 만다.
그 후 그녀는 ‘이혼고백서’내는데
지금 읽어봐도 남녀 평등에 대한 결기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거세게 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나혜석이
미디어에 관심을 봤게 된 것은
그의 셋째 아들, 김건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2015년 11월 아들, 김건 한국은행 전총재가 세상을 떠나고
7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남편의 유언에 따라
나혜석과 김우영의 초상화를 수원시에 기중하게 된다.
이 때 다시 한번 나혜석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지금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에 가면
두사람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살아 생전에 이혼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 같은 공간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