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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세대와 가정집 세대의 차이

by 바람난 인문학 Jan 24. 2025

 행복한 죽음이란 자기가 살던 곳에서

자기가 죽을 때를 대충 아는 상태로 죽는 것

즉 비명횡사가 아닌 것

친하게 지낸 사람들과 작별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밖에서 죽는 것을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로 여겼다.

최근에도 병원에서 생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면

집에 가서 숨을 거두겠다는 어른들이 많다.

예전부터 내려온 유전자 때문이다.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것도

비명횡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들 

십대 이십대는 추억의 디딤돌이 없다.

사오십대 이상은 대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정원에서 자라나는 꽃과 풀이 선물하는 

사계절 변화를 느끼며 감수성을 키웠다.

방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순간

자연 학습장이 펼쳐졌던 것이다.

마당 구석에 채송화가

자라서 꽃을 피고

여자 아이들은 그 꽃으로 손톱에 물들이고

누가누가 오래가나 견주기도 했다.

담벼락 밑에 자란 해바라기는 점점 커서

내 키를 훨씬 넘어 담밖으로 

노란 얼굴을 내밀어 동네 사람들을 기분 좋게 했다.

덩굴 장미를 키우는 집은 

여름이면 담벼락에 빨간 장미 송이를 피워

온 동네가 꽃밭이 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자란 세대들에게는

유일하게 변하는 것은 TV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TV앞에 쪼그려 앉는 것이다.

유치원을 끝내고 돌아온 아이도

학교 공부를 마친 아이도

심지어 직장에서 일을 마친 아빠도

TV앞에 쪼그려 앉아

리얼 삶에서 없었던 변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유익하거나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내삶의 유일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은 TV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그래서 발코니에 화분을 심고 키웠다.

유일한 변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요즘은 발코니 확장으로 없어져 버렸다.

발코니 확장으로 안방과 거실이 넓어졌지만

변화의 공간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불행한 세대는 현재 십대 이십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슴을 움직이는 변화를 보고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감수성도 없고 공감 능력도 없다

아이들 키우기 힘들다고 하고

학폭이 난무하는 것도

우리의 환경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교육 탓만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아이들의 가슴에 풀 한포기가 자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수정을 해주고

그것이 열매가 되어 가을에는 맛있는 감이 되고 사과가 되고 

배가 되는 현장을 구경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정의 꿀이 흐르겠는가?

그래도 2,30년 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제법 나무들이 크고 우거져 있어

아이들이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다.

여름이면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곤충 채집도 하고 하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는 그런 호사가 없다.

오직 평수의 대소만 있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지속된다면

청소년 범죄와 황폐화는 지속될 것이다.

마을마다 노인정이 있는 것처럼

청소년 방이 있었으면 한다.

공부와 체험의 공유를 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단순히 학업 증진을 위한

독서실 같은 공간이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 와서 친구가 되고 고민도 함께 하고

방학이면 친구들끼리 놀러도 다니고

그래서 함께 공유하는 생각과 체험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다.

단연코 성적은 올라갈 것이고

왕따 문제도 사라질 것이다.

경쟁 구도로 몰리니까

아이들이 사나워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신년에는 좀 더 우리 사회를 위한

글들을 써보려고 한다.

물론 지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DNA를 

통찰력있게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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