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7일 송대관씨가 숨졌다.
송대관은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해
1975년 '해뜰날'이 히트하며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후 '네박자', '유행가', '차표 한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980년대 이후에는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사대천왕으로 올라섰다.
그후 그는 대한민국의 트로트를 대표하는
스타로 영면할 때까지 인기를 구사했다.
특히 태진아씨와의 우정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 정도였다.
두사람 모두 인기를 구사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한 경험도 비슷하다.
두 사람이 실제 찐친이기도 하지만
인기를 위한 관리 차원에서
더욱 재미 요소를 극대화 시킨 점도 있을 것이다.
그가 부른 해뜰날은 국민가요가 되었고
못 살고 힘든 살림살이에
제목처럼 헤뜰날이 오겠지 라는 기대감으로
더욱 인기를 얻은 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항간의 루머로 박정희대통령도 이 노래를 좋아했고
조국 근대화에 맞는 노래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해뜰날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표절 사건이었다.
J 가일스 밴드(The J. Geils Band)의 노래 중에
1981년에 발표한 ‘Ceterfold’가 있는데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무려 6주간 차지할 정도로
히트를 쳤었고 그 곡이 한국의 젊은 층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
송대관 측은 표절 의혹을 제기했지만
상대 측에서 거의 무시할 정도여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 방송가에서도 꾸준히 추적했는데
멤버 중 한 명이 해뜰날이 히트할 당시
주한 미군에 근무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더욱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기도 했다.
송대관은 해뜰날의 인기에 힘입어
그 후 ‘네박자’ ‘유행가’ ‘차표 한장’ ‘정 때문에’ 등
메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인기에 편승해 드라마와 영화에도 출연했고
각종 예능에 섭외 1순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호사다마라고
부인이 건축 시행을 하면서 대형 부도를 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논란이 많이 일기는 했지만
이태원의 고가 집도 팔고 정리해서
많은 부분 갚고
또 탕감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혼 대신 아내가 저지른 부도 금액을
개미처럼 일하면서 갚아가고 있었다.
인기 스타들은 부를 쉽게 벌기 때문에
가족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여겨서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물론 가족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그런 함정에 빠져 오랜 시간
대중의 눈 밖에 나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동시대를 움직인 거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고 가족에게 위로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