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의 첫 경험

by 고작가

첫사랑, 첫눈, 첫 차... ‘처음’이란 단어만큼 설레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을까?

어릴 적, ‘남탕’이란 곳을 처음 데려가 준 ‘그분’과 먹었던 ‘바나나 우유’의 맛은 중년이 된 지금까지 나의 미각을 지배하는 듯하다. 우유를 잘 먹지 않는 나지만, ‘바나나 우유’ 만큼은 요즈음도 즐겨 먹는 게 신기한 건 그때의 첫맛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접해본 음식의 기억은 평생 그 음식을 먹을 때마다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음식의 맛뿐 아니라, 같이 먹었던 사람들과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나는 듯하다.

중학생 시절, 비 오는 오후. ‘그분’과 한가로이 목욕탕엘 가서 시원하게 목욕도 하고, 맛있는 바나나 우유도 먹었다.

우산을 나란히 쓰고 집이 아닌 동네 중국집으로 들어가시는 ‘그분’을 따라 간 그곳에 기분 좋은 따뜻한 향이 가득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기분 좋은 향은 ‘재스민 차’ 향이었고, 나는 지금도 날이 쌀쌀한 날이면, ‘재스민 차’를 마신다.

애주가 셨던 ‘그분’이 비 오는 오후 아들과 함께 한 첫 중국집 데이트 메뉴는 ‘난자완스와 고량주’였다.

짜장면과 탕수육이 전부인 줄 알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인 아들에게 ‘청요리’란 신세계를 알려주신 ‘그분’은 사실 처음 먹어본 음식의 대부분을 함께 해주신 고마운 분이다.

빈속에 마시는 첫 잔이 가장 맛이 좋다며, 작은 잔에 맑은 고량주를 부어 한입에 털어 넣으시곤 생양파를 춘장에 찍어 드시던 그 모습이 맛있어 보여, 대학생이 되어 몇 번 따라 해 보았지만 보기만큼 맛있지는 않고, 많이 쓰기만 했다.

왕만두처럼 큰 먹음직스러운 고기 완자에 향긋한 소스가 뿌려진 난자완스는 입에 넣기도 전에 ‘맛있겠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탕수육과 달리 부드러운 고기 덩어리는 달콤한 소스가 녹아 스며들어 입에 넣자마자 부드럽게 넘어갔다.

고량주를 맛있게 드시던 ‘그분’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맛 좀 볼래?’ 하시며, 혀 끝에만 데 보라고 권해주셨고, 천진난만하게 한 모금 마셨다가 냉수와 단무지로 혀끝의 불을 껐던 그 뜨거운 첫맛은 어느덧 그때 그분의 연배가 된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는 친구 같은 맛이 되어 버렸다.

무엇을 사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분’은 참 많은 사랑을 주셨다.

학생 시절, 10년이 넘는 시간 도시락을 싸주신 엄마의 사랑이 ‘집밥’이었다면, ‘그분’의 사랑은 다양한 외식이었다.

숯불에 구워 먹는 갈비와 식후 냉면, 지금도 여름이면 밥 보다 자주 먹는 시원한 콩국수와 메밀, 겨울이면 생각나는 설렁탕과 깍두기 까지.

어느덧 중년이 되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즐겨먹는 모든 외식메뉴를 나는 ‘그분’과 처음 같이 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잠이 덜 깬 우리 남매를 깨워서 손수 차를 몰고 새벽길을 달려갔던 군산의 ‘일흥옥’이란 해장국집의 맛이 그리워, 몇 해 전에 일부러 군산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때의 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세월의 지나간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변하지 않은 ‘일흥옥’의 콩나물 해장국 맛은 지금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그분’의 잔상을 떠올라 주게 했다.

노른자를 터트리지 말아야 한다며, 앞접시에 손수 덜어 ‘후 후’ 불어 주시던 인자하신 ‘그분’이 우리 앞에 계신 것 같아 해장국을 먹는 내내 울컥했지만, 그 기억이 너무 소중해 슬프다는 말보다는 기쁘다는 표현이 어울릴 소중한 맛의 기억이었다.

강렬했던 ‘그분’과의 첫 음식에 대한 기억은, 지금은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 됐지만, 지금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분’이 항상 함께 계신 것 같아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분’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아서 일까?

비 오는 오후. 난자완스와 고량주가 먹고 싶은 것인지, 그분과의 추억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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