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2021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by 링링

2021년에 발행했던 블로그 글의 재업로드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사회적 가청영역에 들어왔다. 젊은 작가상을 받은 모든 작품이 페미니즘을 기반 삼아 여러 다양성을 쌓아 올렸다. 짧은 소설은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방학 첫 책을 고민도 없이 골랐다. 한 소설을 단숨에 읽고 다른 소설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완전한 나의 오만이었다. 한 소설을 읽고 마음속으로 다시 그 이야기를 그렸다. 그리고 다시 행간에 숨겨진 내용을 헤아렸고 또 그것이 내 의무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의무이기도 하며 독자로 작가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되새김의 과정 중 작가가 만든 가상 세계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했기에 글로 남기고자 한다.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장 마음속에 남은 작품이다. 연구소에서 만난 묘하게 평등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눈 남성을 보고 ‘나’는 학창 시절의 ‘장 피에르’를 떠올린다. ‘장 피에르’라는 인물이 결국 미투와 유사한 사회적 고발을 통해 그의 추악한 사생활이 공개되었으나 끝내 그의 추종자들에 ‘덕에’ 그의 권위는 여전히 유지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그의 모습은 위태롭기에 처연하고 그래서 눈이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예술적인” 모습에 20살 초반의 학생들은 자연스레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의 영화도 짧게 묘사된다. 30분 길이의 무성영화, 내러티브라고 할 것도 없고 오직 이미지만으로 이끌어가는 의자의 일생. 이런 것도 예술인가? 그의 의자 이야기는 주인공 티셔츠 위 뽀와 뚜비 이미지와 대립한다. 그리고 20대 여성 제자를 성애적 가능성이 열려있는 대상으로 보는 ‘장 피에르’는 주인공이 맞닥뜨린 변태 할아버지와 대립한다. 다른가? 유치한 예술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걸 다르다고 정의했지? 변태적 성향의 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그건 누구의 인정을 받았지?


그러니까 권력을 가지고 다 가진 상태에서 불행함, 우울함을 찾아낸 그는, 그의 변태적인 성적 취향과 이해받기 어려운 예술적 취향마저도 그가 하는 예술의 한 갈래로 여겨지고 설사 그것이 다 밝혀지더라도 그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는다. 그게 그가 가지는 권력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의 권력은 그의 반윤리적인 위태로움이 패션처럼 작용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결국 그 패션에 희생된 연수는..


주인공과 연수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난다. 그리고 헤어진 며칠 뒤 연수가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되자고. 그 문자를 읽은 나도 다짐했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는 사람이 되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을 덧붙이며 좀 논외일 수 있지만.. 씨네 마운틴에서 장항준 감독이 이해준 감독이 했던 말이라고 공유해 준 문구다.


“도덕과 윤리를 넘어선 재능이라는 게 세상에 있을 수 있어? 만에 하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린 그걸 인정해선 안 돼.”


인정해선 안 돼.



그 외에도 나뭇잎이 마르고의 주인공 체와 앙헬의 이야기, 사랑하는 이야기의 나와 동성 연인이 사랑을 주제로 나눈 이야기, 목화맨션에서 갑과 을로 만난 서로가 묵처럼 떫지만 고소하고 고소하지만 떫은 관계를 맺는 이야기,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에서 진정한 승패에서 엄마가 흘린 눈물과 엄마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 0%를 향하여에서 독립영화의 존폐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소원인 과학 소년에서 시공간을 불문하고 모든 순간 사회가 정의한 ‘정상성’에서 항상 배제되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이야기


체의 모습은 그러니까 정말 필요한 모습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 오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에 반감을 느끼고 정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장애인. 우리 미디어에서는 항상 남의 도움에 의존하는 모습만 조명되었지만, 그녀의 별명의 출처가 체 게바라의 체인 것처럼 그가 나에게 남긴 강한 인상은 더할 나위 없는 시원함이었다. 스테레오타입은 어떤 방식이든 인정받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우주가 있기에 하나의 특성으로 정의한 무식한 개념에 가둘 수 없다.


사랑하는 이야기 목화맨션 역시 정말 현실 이야기다. ‘보통’의 가정에서 동성애자 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이 사랑을 정의하는 것. 치열한 부동산 전쟁에서 갑과 을로 만난 관계처럼 보이는 둘이 마주하는 말로. 소설 안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소설 밖에서 실재하는 일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이 글은 정말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뒤의 해설이 압권이다.


0%를 향하여, 사랑하는 것의 초심. 그것을 유지하는 것. 독립영화를 주제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묘하게 울림이 있다. 내가 하는 것을 처음 사랑하게 되는 순간을 상기시키고. 또 그 사람이 어디선가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이 내가 딛는 걸음을 더 단단하게 하는 것. 작가는 작가의 소중한 공간을 독자와 공유하며 공명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나와 사회적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면, 혹은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꼭 읽고 나와 감상을 나눠주길 바라며.


그러니까 이 소설 속 마음에 박힌 단어들을 곱씹고 또 단어들이 입안에서 여러 차례 되뇌다가 자연히 이런 생각을 했다 : 무지가 무관심의 이유가 될 수 있나? 무고한 폭력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나?


무지는 어떤 순간에도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건 인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기에. 인간의 한자는 사람 인과 사이 간 자를 쓴다. 사람이 인간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어 살아가는 사람만이 인간일 수 있다. 그럼 또다시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정하고 이해하고 헤아리고. 사실 내가 길게 이야기해도..


그래서 굵게 변영주 감독님의 82년생 김지영에 관한 감상을 일부 발췌하여 말을 줄이겠다.


“누군가 자신의 힘듦을 고백했을 때 ‘넌 그거 불행한 것도 아니야’라고 하며 불행 배틀을 시작하게 되면 각자 단절된 불행 속에 고립될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 영화의 핵심은 ‘82년생 김지영은 이렇게 아프대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해결해 보자’라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우리’가 손잡고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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