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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니 Mar 05. 2022

물안개

사랑 때문에 아픈 그대에게..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멎어 있는 순간에도 물안개 비슷한 습기 덩어리가 유리창 너머로 넓게 걸쳐져 있다.
찻잔을 들고 무심히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어느 시인이 사랑의 감정을 물안개라고 표현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햇살이 비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안개 말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라고들 말한다.
하물며, 조변석개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랴.
슬픈 이야기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우리는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고

세상도 그래서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루라도 음성을 듣거나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용광로 같은 사랑이 결코 식을 줄 모른다면,
누군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진 마음이 계속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생겨났던 수많은 상처들이 아물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을 견뎌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쉼 없이 돌아가야 하는 이 세상도 진작에 멈춰 버렸을지 모르겠다.

한때 그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으로만 버틸 수 있었던 지난날이 있었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이미 편안해졌다는 말일 것이다.
밤마다 치가 떨리는 배신감으로 잠 못 이뤘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리에 그리움이 들어앉아 있더라고 고백하던 시인도 떠오른다.


지금은 누군가를 잊거나 용서하기 힘들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 그때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낮과 밤을 몸부림치며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을 붉히던 분노나 그리움도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이다.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힘들고 비참하게 했던 그 누군가의 거짓과 위선, 무례함과 그 속에 숨어 있던 구차스러운 욕망마저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나를 쓰나미처럼 훑고 지나갔던 과거의 모든 일들은 물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실체가 없는 '생각'으로만 덩그러니 박제되어 남았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지나고 보면 덧없는 한바탕 꿈일 뿐!


창밖을 흘낏 보니 빗방울은 보이지 않는데 우산을 쓴 행인 하나가 저 편 인도를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옷을 젖게 만드는 안개 같은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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