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십 2
<스킨십 2>
어느 날은 영화 "늑대와의 춤"이 한창 호평을 받고 있던 터라 우리도 극장엘 갔다. 미국 서부의 광활한 대자연이 장중한 음악과 어우러져 나는 넋을 잃고 보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다가 장면 중에 주인공이 뒷모습이 나체로 인디언들에게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자 녀석은 급한 김에 들고 있던 부채로 내 눈을 가렸다. 전혀 야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구성상 중간중간 남녀의 잠자리 장면이 잠깐씩 나오면 그 장면이 끝날 때까지 아예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다 덮어버렸다. 늘 그런 식이었다. 저는 볼 거 다 보면서 나는 보면 큰일이 나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태백산맥’ 도, ‘가시나무새’ 도 멋진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야한 부분이 많이 나오니 나중에 빌려준다고 했다. 영화는 서서히 슬퍼지고 있었다. 헌데 주위가 어두워서 그런지 녀석은 간이 커져서 물었다.
"우리 손잡고 볼래?"
나는 심각한 얼굴로 화도 안 내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왜? 그럼 더 재밌냐?"
정말 궁금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말이다. 그랬더니 녀석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됐어, 됐어"
하고 넘어갔다. 왠지 좀 미안했다. 다시 영화에 열중하는데 전쟁 장면이 나오자 녀석도 나도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영화도 영화지만 나는 극장에서 너무 몰입해서 옆 사람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웃거나 놀라거나 하는 버릇이 있어서 더욱 긴장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아, 괜찮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야.’ 하는 주문을 걸며 화면을 보고 있는데 대포가 나오고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가 나자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함께 긴장하고 있던 녀석이 재빨리 내 입을 손으로 막고 "괜찮아!" 하며 손을 꽉 잡는 게 아닌가!
나는 소리에 놀란 것도 진정이 안 됐는데 녀석의 행동에 더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그 순간 왠지 녀석에게 무안을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잠시 그렇게 두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민망할 뿐...... 녀석은 무슨 느낌이 있기나 했을까? 잘 모르겠다. 녀석은 큰 소리가 다 끝나도 손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기회를 봐서 슬쩍 뺐는데 그때 잠시 녀석을 그렇게 놔둔 건 내가 녀석을 사귀면서 몇 안 되는 잘한 행동 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내 친구들은 녀석 이야기를 들으면 늘 나더러 절을 하라고 했다. 요새 그런 남자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그 당시에 사실 나는 별로 고맙지가 않았다.
‘당연한 걸 왜 고마워하라는 거지?’
나는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연인들이 왜 극장에서 손을 잡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선천적으로 성적으로 많이 미숙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녀석이 정말 고맙다. 열아홉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밤에 집에 바래다주며 걸음조차 조심스레 걷기가 어디 쉬운가. 그래서 녀석도 가끔 농을 했다.
"야. “
“왜.”
“나도 남자다."
그러면 그 말은 십 원 한 푼도 못 건지고 곧바로 녀석에게 되돌아간다.
"나는 여자다. 그래서 뭐!"
"그냥, 가끔 네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흥! 잘났다. 이 남. 자. 야!"
우리는 함께 다니던 햇수로 사 년 동안 우린 고작 두 어 번 손을 잡은 것 같다. 그게 우리가 한 신체 접촉의 전부다. 그중 한 번은 두툼한 장갑을 끼고 있는 나와 무슨 실랑이를 벌이다가 내가 줄행랑 쪽을 택하자 녀석이 얼결에 손을 잡아서...... 그때 실랑이는 잊고 녀석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 두꺼운 장갑, 거의 솜뭉치를 잡고 있는 데도 그 얘는 왜 그렇게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나는 녀석이 하도 진지해서 진짜 얼떨결에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 정적은 내 장난기에 이 분도 채 못 갔지만. 또 한 번은 오랜 수다 끝이었던가 정말 악수를 했다. 서로의 건투를 빌어주는 주체 못 할 우정에서.
요사이는 십 대가 잠자리까지 하는 일이 흔하지만 그래서 나의 이런 이야기가 우스갯거리가 되고 나나 그 친구가 좀 모자란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나는 우리처럼 해보길 권하고 싶다. 손 끝 하나 잡지 않고도 우린 종종 깊은 사고의 일치를 경험했고 신뢰가 있었다. 물론 내 쪽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사실 나는 그 친구를 좀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내가 그 친구에게 내 마음을 언제나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해질 때 해결될 일이지 신체적 접촉을 한다고 해결될 것은 아니었다. 방학 중에 잠깐 귀국했을 때 십 대의 고민을 해결하던 TV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아주 참하게 생긴 교회에 다니는 여학생이 고민상담을 나온 것을 보았다. 그 여학생의 고민은 이랬다. ‘교회에 좋아하는 오빠가 있는데 회장이에요. 그런데 오빠도 나를 좋아한다면서 제 손도 안 잡고 스킨십도 거의 없어요. 정말 저를 좋아하는 걸까요? 오빠에게 스킨십을 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나를 매우 슬프게 했다. 고작 떠나 있던 1년여 동안 세상이 이렇게 변했을까 의아스러웠다. 한국에 돌아와서 중학교 은사님께서 주최하시는 청소년 수련회에서 몇 번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 한 번은 청소년의 이성교제에 대해서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 남학생들이 몇이 있다. 당시 대부분 고3이었던 그 학생들은 ‘이성친구와의 신체접촉을 10단계(전혀 안 함(0)-손잡음(1)-어깨에 손 올림(2)-이마에 입맞춤(3)-포옹(4)-입술에 입맞춤(5)-옷 위로 만짐(6)-옷 속으로 만짐(7)-옷을 벗고 만짐(8)-성관계 전 모든 행동(9)-성관계(10))로 보았을 때 청소년으로서 가능한 수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7단계라고 대답했고 9단계라고 생각하는 학생도 1명 있었다. 물론 그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정말로 그런 행동단계까지 실행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또 강의가 진행되면서 점점 단계를 내리는데 나와 동의했다. 십 대의 우러름을 사는 많은 연예인들이 혼전 임신 상태로 결혼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가 않다. 요즘은 결혼하고서 열 달을 채워 출산을 하면 뭔가 이상할 지경이다.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물론 결혼식이 결혼이 아니라 성적 관계를 갖는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한 몸이고 혼인 관계다. 그래서 그들은 부부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혼전 성관계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마음도 확신하지 못한 채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고 많은 경우 서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버림받기 두려워 처음부터 배타적 관계를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 요즘 대학생들은 서로 육체를 허락하지 않으면 사귀지도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서로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 후회로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자신의 영혼을 울부짖음을 못 들은 체한다. 사실 육체의 기억과 버림받은 기억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내 학생들은 이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에이, 선생님. 사귀면서 어떻게 그래요. 그러면 정말로 좋아하는 게 아니죠.”
“맞아요. 선생님은 사귄 게 아니에요. 그냥 서로 관심이 있던 거죠.”
“선생님이 지어낸 얘기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녀석들도 그 녀석의 친필 서신을 보면 나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나도 이렇게 살고 있고 녀석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녀석과 나는 극렬한 금욕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린 창조의 모든 것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즐겼고 또 더욱 즐기기를 갈망했던 부류들이었다. 우린 극장에서 동물의 왕국만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류도 아니었고 성은 자손의 번성을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건 파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아주 높게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은 놀랍게도 그다지 힘겹지 않았다. 마치 명문가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효심이 억지로 해야 하는 힘겨운 것이 아니듯이, 금슬 좋은 부부 밑에서 자란 아들들이 바람피우고 싶은 것을 힘겹게 참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아내에게만 평생 집중하듯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아주 깊게 아꼈다. 하다못해 서로가 혹시 만날 수도 있는 미래의 서로의 진짜 주인까지도. 이 점에 대해서는 녀석의 생각은 잘 모르지만 나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미래란 항상 변수가 있으므로. 이 녀석 옆에 먼 훗날 혹시 다른 사람이 서게 된다면 이 녀석이 그이에게 미안하지 않게 해 주리라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혹자는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랬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십 대는 너무 성숙해서 육체를 나누고도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녀석을 기억하고 이렇게 이야기로 엮는 이유는 나에게 정말로 깨끗한 사귐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 준 것 때문이다. 내가 녀석에게서 받은 것이 풋사랑일지라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성숙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상대를 온전히 받아 안고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것. 사랑에 그 이상이 또 있을까? 가끔은 남들이 육십이 되어도 못하는 사랑을 십 대에 할 줄 아는 아이가 있기는 있다. 녀석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