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꿈>
우리는 늘 꿈을 꾸었다. 녀석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건 늘 녀석과 꿈을 꾸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가장 갈망하던 세상은 일차적으로는 고등학생들이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밤길을 여학생 혼자 다녀도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꿈꿨다. 그건 아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해서였겠지만. 친구를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되는 세상. 서로의 장점을 봐라 봐 줄 시간이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꿨다.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학문이 좋아서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꼭 그가 사회적인 존경과 부를 함께 가질 필요가 없는 세상. 교수는 명예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사업가는 부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남의 것을 욕심 낼 필요가 없는 세상. 그런 조국에서 숨 쉬며 살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보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다. 정작 답이 없어 그 끝은 답답했지만 그래도 그런 세상을 그려보는 건 참 행복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룰 진로의 선택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녀석은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정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 힘들었다.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수학의 벽에서 일찌감치 문과로 전향하고부터 방황을 거듭했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는 애매한 습성이 나를 괴롭혔다. 무얼 억지로 해낼 수는 있는데 내가 정작 무얼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막연히 시간이 흘렀다. 녀석이 답답하여 나를 재촉했다.
“나랑 정외과 가자.”
“난 정치 싫거든. 아니, 몰라. 정치란 걸.”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 냐. 내가 보기에 넌 정치해도 잘할 거야.”
“아, 몰라. 미치겠어. 난 왜 잘하는 게 없지?”
“너무 많은 건 아니고?”
“놀리냐? 심각하다고.”
“그렇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까? 신내림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모르겠어. 처음 생각하던 것이 꼬이니까 다른 건 어떻게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일단 아무거나 하나 정하는 거야. 그리고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또 바꾸면 되지. 너처럼 다 찾은 다음에 뭘 하려면 시간만 갈 뿐이야......”
나는 녀석이 말대로 고민만 하다가 결국 녀석과 같은 과를 시험 보고 떨어졌다. 떨어지고서 후회도 많았다. 하지만 녀석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옛날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시간 낭비를 했는지... 대학이 인생에서 직업도 결정해 주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냥 하고 싶은 공부를 할걸...... 진로니, 미래니, 책임감이니 하는 것을 다 잊고 그냥 하고 싶은 공부를 생각해 볼걸...... 선교사가 되겠다고 무작정 간호학과를 가다니...... 그땐 그렇게 시야가 좁았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의료는 분명 현장의 필요에서 거의 일 순위가 맞지만 다른 분야의 전문가도 얼마든지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땐 못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도 진로의 고민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너무나 막연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고민이다. 어느 나라 젊은이나 하는 고민이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더욱 심하다. 공부 말고는 해 본 게 없어 무엇을 잘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할까. 아무것도 모르겠으면 일단 아무 거라도 잡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다는 녀석의 충고는 지금 생각해도 참 현명했다. 녀석과 꾼 대부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나는 꿈꾸던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꿈꾸는 것은 산자의 증거이며 특히 젊은이들의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아래의 시를 항상 연습장 맨 앞에 베껴 써서 다녔었다.
꿈꾸는 자
위대한 동경과 약속에 사는 자
그 이름 젊은이다.
티끌에 묻히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에 기뻐하며
영광의 비전을 그 몸에 덧입는 자
그 불굴의 젊은 의지가
이 강산에 불 타 올라야 한다.
-장공 전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