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층간소음 (2)
나는 윗집 할아버지와 아저씨 사이, 그를 욕쟁이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욕쟁이 아저씨는 왜 그렇게 욱하고 화를 냈을까. 아저씨 말대로 설인데.. 설에 자기가 화를 낼 상황도 아닌데 욕하고 날뛰는 모습을 부인과 딸, 사위와 손자 앞에서 보이고 싶었을까.
할아버지와 아저씨 사이. 과도기의 인간은 헤매고,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를 어떻게 견뎌내는지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이 장하기도, 안쓰럽기도, 한 대 때리고 싶게 얄밉고 얄팍하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욕쟁이 아저씨는 열 대, 백 대 꿀밤을 때려주고 싶다. 아저씨가 그 일을 무슨 이유로 가장 후회할지 궁금하다. 후회하긴 했을지 모르겠다만.
별개로 나는 억울하다. 억울해서 앨리와 함께 울었다. 우리는 "왜 나한테?"를 소화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다음에 저 아저씨를 만나면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한다.
"어, 욕쟁이 아저씨네" 할까?
"욕쟁이 아저씨, 안녕하세요."가 더 그에게 쫀득한 엿 같을까. 아니, 정중하게 말할까.
"저 그 욕 다 녹음해 뒀어요. 한 번만 더 저희한테 욕하면 또 녹음해서 고소할게요." (사실 녹음은 못했다)
나는 또 벌어질 비슷한 상황에 어떻게 얼타지 않고, 세게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얕보이지 않도록 대거리하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앨리는 다르다. 억울하지만 그의 "X발"이 스스로의 가엾은 인생을 향한 것이고, 우리는 그 인생을 떠올리게 한 죄로 '잘못' 서있다가 '잘못' 그 욕을 들은 것이라 생각하려 한다. 위-아래 집으로 최소 1년을 더 살아야 하니까 감정의 되먹임을 이어가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건물을 이렇게 짓고 늘 하자에 나 몰라라 하는 임대인 가족과 그들이 싼 값에 고용해서 해치웠을 공사판의 잘못을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을 나누던 우리는 더 슬퍼졌다. 서로의 생각이 모두 틀리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부딪힐 것을 걱정하는 앨리에게 나는 방검복을 사주겠다고 했고, 그 말에 울다 웃었다. 웃다가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