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타시스

S#2. 용산건아

by 당근

나는 지금 용산에 산다. 아, 물론 고개를 아플 만큼 꺾어야 늘어선 마천루를 볼 수 있는 작은 집이다. 조금은 복에 겨운 상황이 있었더라면 무언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요 근래 재수가 좋았던 일이라곤 을지로에서 산 만 원어치 복권이 오만 원이 되었다는 것 정도인데, 그마저도 다시 복권에 쓰고 담배 한 갑 정도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에 달려온 것인지 밀려들어온 것인지 헷갈리는 때가 있다. 늘 그런 식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대입시험이 끝나고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죽어도 전공을 외국어로 선택하지 않겠다고. 그러고는 불어를 전공했다나. 물론 지금은 바게트 정도 주문할 수 있을까 싶다. 사회에 던져져 직업을 고를 때에도 꼬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니 적당한 것을 고르겠다고 다짐하곤, 꽤나 몸집이 큰 시험을 마치고 서울로 달려왔다. (혹은 밀려들어왔다.)

좋은 때도 있었지. 잘 한다 잘 한다 해주니까 진짜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지금 글을 쓰는 이 공간에 새 침대를 넣고 친구들이 명함 넣고 다니라며 괜찮은 가죽을 기워서 만든 지갑을 선물해 줬을 땐 사실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오래전에 한 번 살면서 밥을 몇 술 떠봤을까 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이를 한참 지나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한 단어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무튼 여기서 생활한지 곧 1년이 되어간다. 가고 싶은 곳에는 언제든 갈 수 있다. 가까우니까. 본가에 머물 때엔 오고 가는 길이 아까워서 새벽 늦게까지 놀곤 했는데, 이젠 딱히 무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몸에 감고 다니고 싶던 향수나 신발은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가까워졌다. 손에 쉽게 닿으니 전처럼 애착이 가지도 않는다.

약간 여유로운 시기가 찾아오니 눈이 돌아가서 득달같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작했다. 심지어 머릿속엔 더 많은데 몸이 한 개라 조절하고 있다. 필수불가결하게 서울에 사는 나는 버티면 버틸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겠지. 근데 이거 약간 지루하다. 여행을 어릴 때 다녀야 한다는 건 시간이나 돈 문제에 기인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때의 간절함이 사라지면 여행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좀 더 다녀보면 생각이 바뀔 부분일지도 몰라.)

막연하게 뭐가 문제인지 느끼면서도 명쾌하게 답을 내지 못한다. 삶의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을 머금은 머리가 텅 비는 기분에 자꾸 어릴 적 어른들 탓을 하고 싶어진다. 이런 날 혼자 자면 기분 나쁜 꿈을 꾼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아침 일어나서 머리를 손질하고 보안이 철저한 노트북을 챙겨나가 하늘 높이 고개를 꺾을 것이다. 숨이 막혀도 멀쩡한 척 소화할 스케쥴을 살피고 무겁고 큰 문을 열면서 나를 속인다.

나는 용산의 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