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바칩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이자, 그 누구도 쉽게 내뱉지 않는 말이 있다면 아무래도 “공부를 왜 해?”일까나. 학생들에겐 저 질문이 반복적인 체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에서 잠시 반짝였다가 사회인이 된 저들을 떠올리며 허무함과 무력함을 느끼고, 어른들은 기계처럼 움직이는 학생들의 마음까지 부품이 된 모습을 확인하기 싫어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쉽게 느낌표를 던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새로운 지식을 달게 삼켜냈다. 그 모습에서 답을 찾았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의사나 약사는 아니다. 책으로, 글로, 말로, 그러니까 유한한 단어들로 무한한 문장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세계를 듣고, 그 세계를 일으킨다. 그러고 있고, 그러고 싶다. 내 평생을 글을 쓰고 책을 엮고 사람을 위로하는 데에 바치고 싶다. 이런 내게 세상 모든 것은 다 글감이다. 아침에 일어나 멍한 상태로 있는 것도, 밤에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도, 내가 마주하는 이 작고 작은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도구를 만들어낸다. 공부로 마주하는 새로운 세상이, 새로운 소재와 글감이, 아침마다 다른 감정들이,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한다. 내 것이 된 새로운 세상들은, 다 내 작품이 된다. 내게는 그저 자신들을 글로, 예술로 서술해 달라는 속삭임으로 보인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어찌 공부가 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로 이어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힘들고, 자신들의 세상은 폐허 됐다고 말한다.
영화 ‘소울’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느 작은 물고기가 한 늙은 물고기에게 물었다. 저는 넓고 큰 바다를 원해요. 바다로 가고 싶어요. 바다가 어디 있죠? 늙은 물고기가 말했다. 바다? 여기가 바다인데. 그 작은 물고기는 부인했다. 아뇨, 바다요. 넓고, 정말 크고, 깊고. 아름다운 바다 말이에요.
스스로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거울이 되어준다.
남들이 보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뛰어난 게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 잠시 맑은 하늘을 볼 여유를 챙긴다. 글로 차분히 가슴속 울렁거림을 토해서 마음도 진정시킨다. 나날이 행복으로 묻어져 나오는 삶을 빚기에, 그런 내게 빛이 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내 세상은, 내 하루들은 특별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는 나의 특별함을 알고 나만의 공부 이유도 알고 있다. 어쩌면 그게 내 존재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거울이 되어주는 것. 그렇게 사람을 살리는 것. 그렇게 행복한 사회를 가꾸는 것.
한 사람의 세상을 살리는 것은 무언가 많이 요구되지 않는다. 책임감도, 금전도, 무한히 깊은 진심과 말들도 아니다. 그저 앞에 서서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면 된다. 네가 모르는 네 모습. 넌 모르지. 네가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