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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아바 Mar 16. 2020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냉장고를 비우다.

10개월, 38주 2일(D-12)

집안일은 정말 끝이 없다. 반복적으로 계속되면서도 꾸준히 손대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손댈 엄두가 안 난다. 우리 집에서 손님들에게 절대 제대로 공개할 수 없었던 물건(장소) top 3 중 하나가 바로... '냉장고'다.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을 즐겨하지 않고, 물건을 제 때 버리는 걸 하지 못하는 성격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겉과 속이 다른 미지의 존재가 되어있었다.


예전에 정말 재밌게 보았던 '카우보이 비밥'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가 나타나 주인공들을 습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남자 주인공이 몰래 숨겨둔 채 방치됐던 냉장고 속 1년 묵은 바닷가재였던 무언가였다. 결국 주인공들은 사투 끝에 냉장고를 우주선 밖에 던져버리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내리게 된다. 


다행히도 냉장고를 집 밖에 던져버리진 않았지만 애니메이션 속 냉장고 못지않게 우리의 냉장고는 미지의 존재로 변모해 있었다. 그동안 우리 부부의 식생활 변천사를 고스란히 발굴할 수 있었던 유적지 같았다. 냉장과 냉동의 세계를 유영하던 수많은 반찬, 식재료(였던 것들), 냉동식품 등을 꺼내며 평소보다 최소 18배는 많은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했고, 우리의 냉장고는 이 집에서 처음으로 미니멀리즘이 실현된 공간이 되었다.

앞으로 이 냉장고를 함께 사용하게 될 한 사람을 맞이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냉동고에는 아이를 위한 모유를 얼려두어야 할 것이고, 냉장고에는 이유식의 재료들을 정리해두어야 할 것이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앞으로도 냉장고는 한눈에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지금의 상태를 위해 최대한 비워두고, 또 빨리 비워내자고 남편과 다짐했다. 냉동과 냉장의 세계에서 식히고 얼려두었던 음식들처럼 내 인생에서 미루고 방치했던 것들을 이제 더 이상은 두고 보지 말자고도 결심했다.


지난 약 3년 동안 나와 남편, 두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공존하던 이 집에 곧 찾아오게 될 연약하고 소중한 새로운 가족을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다. 우리들만의 것으로 가득했던 것들을 비워내고 새로운 가족을 위하여 나누고 채워나가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또 다른 것들을 비우고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 결국 미루고 미루다 이번엔 제대로 정리한 냉장고처럼, 그렇게 제대로 비워내자고 결심해본다.(다음 타깃은 옷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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